이득수 서울취재본부장

[이득수 서울취재본부장] '청와대 비선실세'로 드러난 최순실씨의 미르·K스포츠재단을 통한 국정개입·후원금 횡령 의혹을 비롯해 우병우 민정수석의 처가 부동산 특혜매각 의혹,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과 후원금 모금과정에 청와대 경제수석 개입의혹 등이 줄줄이 터져 현 정권의 임기 말 레임덕을 재촉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24일 오전 10시 국회에서 새해예산안 시정연설을 하면서 돌연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과 운영비리 의혹, 우 수석 의혹 등을 덮어버리고 국정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당일 저녁 JTBC를 통해 대통령 연설문 유출 사건이 보도되면서 '개헌 블랙홀'은 소멸돼 버렸다. 대통령은 바로 다음날 오후 4시 춘추관 기자회견실에서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과 관련해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했다. 이틀에 걸쳐 약 30시간 동안 대한민국 국민들을 대통령의 표현 그대로 '놀라고 마음 아프고', 화가 나고 절망해야 했다. 대통령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지만,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진들의 책임도 결코 덜하지 않다.

 개헌추진 발표부터 살펴보자. 지난 4년간 개헌논의가 "모든 국정 이슈를 삼켜버리는 블랙홀이 된다"며 강하게 반대해 오던 데서 입장을 180도 바꾼 것이다. 야당 지도자들은 즉각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중차대한 사안을 최순실·우병우 의혹을 덮고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소재로 사용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대다수 국민들도 이에 공감했다. 대통령의 의도가 빗나간 셈이다. 순수하게 개헌의 필요성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발표 시점이 오해를 받기에 충분한 상황임을 감안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역시 참모진의 책임이다.

 최순실 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사전에 받아보고 수정한 사건은 참모들이 바른 말을 했더라면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다. 미혼인 박 대통령이 의상 구입 등 잡다한 일을 최 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 최 씨를 대통령실 제2부속실장으로 기용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일개 강남 아낙네가 국정을 농단했다'는 미증유의 사태로 진전되는 것은 피할 가능성은 있었다. 적어도 사건이 불거질 무렵에라도 공조직에 편입시켰더라면 빠져나갈 구멍이라도 생겼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대국민사과문 발표는 그 시기 선정이나 내용이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상황인식조차 제대로 안 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만 했다. 이 부분도 당연히 참모들이 책임져야 한다. 문건 전달자로 지목된 정호성 제2부속실비서관과 '문고리 3인방'으로 불리는 실세 비서관들이 당당히 나서서 모든 걸 안고 사퇴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아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듯한 모양새는 매우 썰렁했다. 참모들이 서로 눈치나 보고 몸들을 사리고 있으니, 대통령이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한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선 최소한 경제수석(현재는 정책조정수석), 민정수석, 홍보수석, 정무수석 등은 사표를 내야 한다. 그리고 대대적인 참모진 개편을 통해 임기 말 식물정권으로 전락해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는 상황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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