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현웅ㆍ소설가
사마천이 쓴 사기를 보면 기원전 340년 경, 진나라가 약양에서 함양으로 수도를 옮기며 변법을 활성화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노자가 생존해 있을 무렵인데, 춘추 전국 시대를 격고 있는 여러 제후들은 저마다 학파의 인재들을 영입해서 국가 중흥에 나선다. 그 중에 진나라는 약소국가였다. 진나라 국왕 영거량이 위앙이라는 선비를 영입해서 그를 통해 변법을 시행한다. 즉, 그 전에는 국가를 통치하는 이렇다할 법이 없어 왕권이나 귀족 위주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위앙이 만든 법은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법 앞에 모든 이는 평등하다는 것이다. 자연히 왕족과 귀족들로부터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법을 시행하는 과정에 하나의 시련이 닥친다. 농경지 물을 대는 문제로 부족간에 싸움이 일어나서 수백명이 죽는다. 이 일은 한두번 있었던 일이 아니고, 년래 행사처럼 있어왔던 분쟁이었다. 위앙은 주모자들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한다. 그렇게 잡혀온 사람이 위로는 부족장을 비롯해 관리, 농민, 노예에 이르는 7백여명이 된다. 법에 의하면 그들을 모두 처형해야 한다.

이때 국왕 영거량은 고민을 한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법을 만든 위앙과 국왕은 사흘간 논쟁을 하면서 결론을 못낸다. 그때 국왕이 위앙에게 묻는다.
"죽이지 않고 좀 가볍게 해줄 수는 없는가?"
"안됩니다."
"그렇다면 귀족들만이라도 살릴 수는 없는가? 먼저 판결을 하고, 다음에 내가 특별 사면으로 처리할 수 없는가? 그들을 모두 죽이면 대신들이 반발할 것이네."
"안됩니다. 대왕께서는 대신들이나 귀족들의 마음을 살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민심을 사야 합니다."

그리하여 위앙의 뜻에 따라 7백여명을 모두 참수한다. 진나라의 변법 시행은 성공하고, 진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되며, 그후 약 1백년 후에는 모든 다른 제후국을 통일하게 된다.
여기서 중국의 고대사를 장황하게 열거한 것은 오늘날 우리의 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위해서이다.
재벌이 죄를 지었을 때 재벌이 사회에 공헌한 바가 크다고 봐주고, 정치인이 죄를 지었을 때 먼저 판결하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사면하는 일이 통용화 되고 있다.

최근에 국회에서 벌어진 서부활극을 보면서 법을 만드는 장소에서 법의 집행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하루 이틀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어온 모습이다.
그래서 여당에서는 특별법이라고 해서 국회 내의 폭력을 방지하는 형법을 만들려고 하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법이 있는데 왜 만드냐고 하면서 반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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