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자 수필가

[한옥자 수필가] 질서, 참 듣기 좋은 말이다. 우리나라의 사계절만큼 빼놓지 않고 질서 있게 다가오는 것이 어디 있던가. 그런데도 봄과 가을의 실종을 이야기하고 여름과 겨울만 남을 것이라는 억측을 한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비록 길고 짧음에 대한 변화는 있다지만 단 한 번도 계절을 거르는 법은 없다. 살기에 쾌적한 봄과 가을이 짧게 느껴지고 상대적으로 덥거나 추워서 견디기 어려운 계절은 길게 느껴지는 이의 하소연일지도 모른다. 실제 기상청 관계자도 여름과 겨울의 길이에 변화는 있지만, 가을의 시작은 조금 늦어지나 길이는 크게 변동이 없다고 한다.

 지난 입동에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을 나서니 길이 촉촉했다. 새벽부터 온 비가 길을 적시고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 끝에는 빗물이 조롱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바람을 이기지 못한 잎은 이미 낙엽이 되어 길 위에 수북이 쌓였으나 그렇지 않은 잎은 굳건히 나무에 매달려 있다. 결코, 바람만을 탓할 일이 아니다. 비가 온 다음 날부터 추워질 것이라고 기상청은 예보했다. 말 잘 듣는 국민은 추위를 대비해 겨울 외투를 꺼냈다.

 나의 여고 동창은 걸핏하면 SNS로 불쾌한 자료를 보낸다. 박사모의 매우 열렬한 회원인 그녀는 답 없는 필자에게 틈틈이 섭섭함을 표시한다. 무슨 답을 해주어야 할까. 내 생각을 이야기하자니 말이 길어질 것이고 그의 생각을 동조하자니 가슴이 답답한걸. 그러나 그녀도 그릇된 위정자의 말일지라도 믿음이 강한 말 잘 듣는 양순한 국민이라 차마 차단을 할 수가 없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을 걸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답답하니 자꾸만 땅만 보고 걸었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또 다른 친구의 말 때문이다. 기껏 일을 저질러 놓고 무엇이 부끄럽다는 것일까. 지금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부끄럽고 우리나라가 부끄럽다면 국민도 부끄러워야 한다. 비록 나는 찍지 않았다 해도 가족이, 이웃이, 친구가 투표용지에 찍은 사람이 현 대통령이라면 우리도 다 같이 부끄러워야 한다. 지금에 와서 우리나라가 부끄럽다는 말은 자기는 책임이 없다는 비열한 도피이다.

 광화문의 집회에 참석하자는 지인의 권유를 뒤로하고 강원도 영월의 외씨버선길을 다녀왔다. 김삿갓문학관과 영월 객주를 시작으로 12길인 김삿갓문학길을 걸으면서 가을의 끝자락에 애써 매달렸다. 그러나 몸은 다른 곳에 있었으나 마음은 광화문의 100만 인파 속에서 자유 발언을 하고 있다. '부족한 인간일수록 욕망은 끝이 없다는 말은 진리였습니다'라고.

 가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나뭇잎을 보며 자연에 존재하는 질서를 생각한다. 각종 동식물은 제자리를 지키며 생성하고 소멸한다. 하늘의 별과 달도 때맞춰 뜨고 진다. 지구는 공전과 자전을 거듭하며 계절을 만들고 낮과 밤을 만든다. 모두 질서 정연한 모습이다. 그러나 지구 위에 존재하는 무질서의 가장 큰 대표는 정치이다. 질서 있는 퇴진을 운운하는 우리나라의 모 야당 정치인의 말을 보며 생각해 본다. 그는 질서를 알고 지킬만한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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