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욱 충북도립대 교수

[조동욱 충북도립대 교수] 아, 누구 말 대로 우리 민초들 상처를 치유해 주어야 할 나라의 어른들께서 어쩜 이리도 우리들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탄식을 듣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난다. 오죽하면 술 한 잔 하는 모임에서 건배사가 "위 하야"라고 한다. 내용인 즉, "하야를 위하여"라고 하니 마음이 착잡하다. 언론사 칼럼 작성 의뢰가 들어오면 늘 즐거운 글들로 가볍게 시국을 터치하는 형식으로 글을 쓰는 내가 이번에는 그게 되질 않는다. 아무리 가볍게 쓰고자 노력해도 도무지 그렇게 글이 쓰여 지지 않는다. 금 번 사태가 훗날 우리 후손들이 내 조국이 보다 더 성숙해지고 숙성되어 진 오히려 축복의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로 기록되기만을 그저 간절히 소망할 뿐 이다.

연말도 다가오고, 마음도 무거워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내 마음에 와 닿는다. "성질은 한 번에 내지 말고 12개월 무이자로 조금씩 내고, 상대에 대한 배려는 일시불로 지불할 것, 상처는 계란처럼 잘 풀어주고, 오해는 잘게 다져 이해와 버무리고, 실수는 굳이 넣지 않아도 되는 통깨처럼 조금만. 열정은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서라도 마음껏 쓰고, 은혜는 대출 이자처럼 꼬박꼬박 상환하고, 추억은 이자로 따라오니 특별히 관리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리움은 끝끝내 해지하지 말 것. 의심은 단기 매도로 처분하고, 아픔은 실손 보험으로 처리하고, 행복은 언제 든 지 입출금이 가능한 통장에 넣어 둘 것", 참 주옥같은 글이 아닐 수 없다.

 지울 수 없는 한 사람

또 다른 글을 하나 더 소개하고 싶은데 이글은 너무 의미심장하다. 어느 강좌 시간에 교수가 한 여성에게 "앞에 나와서 칠판에 아주 절친한 사람 20명의 아름을 적으세요" 했다. 여성은 시키는 대로 가족, 이웃, 친구, 친척 등 20명의 이름을 적었다. 그러자 교수는 "이젠 덜 친한 사람들의 이름을 지우세요"라고 말했다. 여성은 이웃의 이름을 지웠다. 교수는 다시 한 사람을 지우라고 했다. 여성은 회사동료의 이름을 지웠다. 드디어  칠판에는 네 사람, 부모와 남편 그리고 아이만 남게 되었다. 교실은 조용해졌고 다른 여성들도 말없이 교수를 바라보았다. 교수는 여성에게 다시 하나를 지우라고 했다. 여성은 망설이다가 부모이름을 지웠다. 교수는 다시 또 하나를 지우라고 했다. 여성은 각오한 듯 아이 이름을 지웠다. 그리고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함께 할 사람은 국민

 얼마 후 여성이 안정을 되찾자 교수가 물었다. "남편을 가장 버리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두가 숨죽이고 여성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성이 대답했다. "시간이 흐르면 부모는 나를 떠날 것이고 아이 역시 언젠가는 나를 떠날 것이다. 하지만 일생을 나와 같이 지낼 사람은 남편뿐입니다" 맞는 말 아닌가 싶다. 권력이든 명예든 다 떠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남편만은 끝까지 함께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라의 어른들께서는 남편이 곧 국민들이라는 생각을 하셔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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