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 위에서 내려다보니 물 냄새, 모래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문득 주요한의 시(詩) '불놀이'가 생각나는 밤이다. 그는 상실한자의 고뇌와 갈등, 그것을 극복해 내려는 의지를 불놀이를 통해 표출해 내었다.

 연일 광화문일대에 빼곡히 들어찬 불의 행렬을 본다. 어이없는 국정농단, 벗기고 벗겨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암적 비리의 실체를 대하면서 아연해 있던 민초들이 들불처럼 일어선 시위 현장이다.
화염병이 난무하고 최루탄 가스로 가득하던 시위현장에 촛불을 켜들고 음악과 함께 축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작은 바람결에도 흔들리는, 연약한 촛불 하나하나에 결연한 자기표현을 담은 민초들의 모습이 장엄하고 아름답다. 주말이면 하나 둘 불을 밝히고 모여든 사람이 수십만 물결을 이뤄 100만,  200만 명을 넘어섰지만 불상사는 없다. 막아선 경찰도 시위대도 물리적 충돌 없이 암묵적인 소통이 이루어진다. 경찰차벽에 꽃 스티커를 붙이는 퍼포먼스도 쉽게 뗄 수 있는 스티커를 택했다 한다. 동원된 의경도 내 아들이라 그들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부모의 마음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위 현장이 이렇듯 배려하며 평화롭게 소통이 이루어지고 아름답게 의사표현을 한단 말인가.  이른 새벽 장독대에 정화수 떠 놓고 정성들여 비손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하나의 촛불로 오버랩 된다. 자신의 몸을 태워 집안을 밝히는 어머니, 그는 그렇게 늘 생명의 소망과 기원을 담은 촛불이 되어 가족을 위해 희생을 감내해 왔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이 더욱 빛나듯이,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온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은 어머니의 정성,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던 국민들의 힘이었다.

  오늘 그 연약한 이들이 촛불을 들고 조용히, 그러나 결연한 의지로 행보를 하고 있다. 위정자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아니 그네들이 혼탁하게 흐려 놓은 세상을 정화시키기 위해 불을 밝혔다. 불은 창조와 정화, 사악함에 맞서는 희망과 파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기도하듯 두 손으로 모아 쥔 촛불이 조용히 제 몸을 사루며 세상을 맑게 하려는 몸짓을 본다.

  촛불은 스스로를 태울 때만이 긍정의 빛을 발한다. 내가 아닌 남을 태우게 되면 곧바로 파괴의 얼굴로 돌변하는 것이 불이다. 종이컵 속에 자작자작 분노를 눌러 담고 청와대로 향하는 발걸음은 준엄한 민의요, 성숙된 시민의식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전국적인 집회가 여섯 차례 이루어지는 동안 일부에서 횃불을 들며 수위를 한 단계 높였다. 말없이 횃불을 높이 든 일행에게 길을 터주고 있는 촛불대열을 보면서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전국에서 분연히 일어선 촛불행렬, 그 불놀이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는 새 생명의 빛이 되길 기대하는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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