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서울취재본부장

[이득수 서울취재본부장] 며칠 전 찰스 헤이 주한 영국 대사와 저녁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청와대에 출입하는 몇몇 기자들과 함께 마련한 일종의 송년모임이었는데, 올 한해 국내외적으로 워낙 경천동지할 일들이 많이 발생했으니 화제도 풍부했다. 세계적 관심을 모은 브렉시트에서부터 박 대통령의 탄핵소추와 헌재의 판결 예상, 한국의 위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대권도전 전망 등 질문과 답변이 간단없이 이어졌다.

 파하기 직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사안이었다. 영국에서 정치실험을 한 '제3의 길'에 대해서 물었다.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정치경제사회의 이념으로서 앤서니 기든스가 이론을 체계화했고, 직전 수상인 토니 블레어가 현실 정치에서 적용했는데 결과가 어떻게 됐는가를 영국의 정치 엘리트로부터 직접 듣고 싶었다.

 헤이 대사의 설명에 따르면 블레어가 10년을 집권한데 이어 고든 브라운을 거쳐 다시 보수당인 데이빗 캐머런으로 넘어가 지난 7월에 테레사 메이에게 넘어갔지만, 제3의 길은 영국 사회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갖고 있는 개혁 이념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무분별한 복지확대나 냉혈동물 같은 신자유주의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지향하는 실용적 사회민주주의가 좌파와 우파 양쪽에서 공격을 받긴 하지만 현실적인 정책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사회통합의 이념으로 건재하다.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말 제3의 길이 한창 각광을 받다 이내 잦아들었다. 이도저도 아닌 중도적 이념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처럼 이념 갈등이 격렬한 한국 상황에서는 새삼 음미해 볼만 하다. 평등·분배·동반성장을 요구하고 남북화해와 교류를 주장하는 진보좌파 세력과 자유무역협정(FTA)·기업활동자유 확대·법인세 인하 등을 추구해 온 보수우파 세력이 늘 첨예하게 대결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우파 진영이, 박근혜 대통령 즉각사퇴 촛불시위는 진보좌파 진영이 주도하고 있다.

 국회도 여야를 떠나 좌파와 우파가 갈려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는데 실패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결정하게 되면 조기 대선을 치러야 한다. 기각된다 해도 차기 대선까지는 1년도 남지 않았다. 다음번 대한민국의 지도자는 이념과 소득, 지역, 세대에 따라 갈갈이 찢긴 국민을 통합해야 할 의무가 있다. 충청 대망론을 타고 유력 대선주자로 떠오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십중팔구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대권도전을 선언할 것으로 예상된다. 탄핵 정국이 시작되면서 출렁이긴 했지만 반 총장은 다시 20%선을 회복, 저변을 단단히 다지고 올라서는 모습을 보였다. 탄탄한 지지기반을 형성했다는 증거다.

 충청대망론이 반기문대망론으로 구체화 되고 있는 이때, 반 총장이 어떤 이념으로 통합의 리더라는 인식을 각인시켜줄 것인가. 경제 살리기나 안보강화, 일자리창출을 내세워서는 허풍떤다는 소리밖에 못 듣는다. 새누리당 친박·비박계든, 중도좌파우파를 아우른 제3지대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안착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열정적 지지에 불을 붙여줄 단순하고 강력한 통합의 메시지를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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