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

[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 제주에 폭설이 예상된다는 말에 가슴이 철컥 내려앉았다. 폭설로 공항이 마비되어 며칠씩 제주를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낭패담이 퍼졌던 작년 일이 떠올랐다. 피치 못할 일정이 겹쳤다. 며칠째 일기예보를 보면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가슴 졸였다. 청주에서 제주, 제주에서 김포, 김포에서 인천공항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간이 딱딱 맞아주어야 하는 일정이었다. 새벽에 청주 공항으로 향하면서 제주 직원에게 실시간으로 날씨를 물었다. 하늘은 맑았지만 요즘 일기예보가 정확하다보니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8시 30분 항공권을 받아들고 출구로 빠져나가기 직전까지 망설이다, 결국 제주를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출발 10분 전에 탑승권을 물렸다. 대안을 실행하기로 했다. 제주에서 오후 두시에 하는 사업제안 발표를 회장님이 하시기로 했다. 비행기가 떠나는 것을 보고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기왕이면 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는 얕은 생각을 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공적인 업무를 미룬 게 영 내키지도 않았고 미안했다. 마음을 읽은 직원이 제주 공항에서 폭설로 출발 지연이 되고 있다는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서 전해준다. 제주 직원들도 대표가 빠지니 더 긴장해서 회장님 발표 준비를 도왔고, 회장님도 능숙하게 발표를 잘하셨다고 전해주었다.

 중요한 일정이 끝났다. 여러 가지 갈등으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긴장했던 시간이 거침없이 흘렀다. 그리고 상황이 종료되었다. 사무실에서 동동거리다 코타키나발루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오후 5시 리무진에 올랐다. 가방 속이 문득 궁금했다. 며칠 동안 가방을 싸며 여행 전 기분을 만끽했던 설렘도 이번 여행에서는 없었다. 새벽에 코타키나발루 공항에 내려서 숙소로 향했다. 갑자기 모공이 화들짝 열리는 것 같았다. 마음이 겨울바람에 내몰린 몸처럼 움츠려져 있었는데 상당한 거리를 이동하고 나니 모진 끈이 끊어진 것처럼 느슨해졌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조금은 자유로웠다.

 액자 속의 그림 같은 풍경이 나타났다. 아직 덜 녹은 발을, 익은 모래를 디디며 풀었다. 등에 닿는 따가운 햇볕이 우리를 바다로 몰았다. 장비를 갖추고 스노클링을 했다. 열대어가 손가락 사이를 스치니 무념무상이다. 환성을 지르며 바닷속 풍경에 빠졌다. 쾌속정을 타고 파도를 뛰어넘으며 너른 바다를 보니 필자가 걱정했던 자그마한 일들이 툭, 툭, 내 몸을 빠져 나갔다. 여행 중에 반가운 문자가 도착했다. '제주 집단상담 사업 선정'. 큰 부담을 안고 출발한 터라 일행들이 더 기뻐해 주었다.

 연말에는 평가 결과에 노심초사하고, 연초에는 사업제안 발표로 엄청난 부담이 있다. 몸도 많이 긴장한 탓인지 내내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발표 도중 갑자기 잇몸에서 피가 나는 바람에, 혀로 피를 핥아 내느라 입모습이 비뚤어졌던 일이 떠올랐다. 집에 와서 거울을 보며 행동을 재연해보니 심사위원들에게 큰 실수를 한 것 같아 마음이 불안했고, 결국 그 제안은 떨어졌다. 제안서가 기준에 들지 않아서 탈락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마음에 상처로 안고 있었던 그 일도, 반가운 문자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하기 어려운 일도 다른 이의 손에서는 꽃으로 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코타키나발루의 초록해안에서 적도의 수평선을 바라보니 한 점 모래알이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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