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바람, 너였구나. 물길, 들길, 숲길, 마을길을 거닐며 봄을 시샘하는 바람, 너였구나. 햇살, 너였구나. 창문 틈을 비집고 쏟아지는 맑고 향기로운 그 빛이 낭창낭창 내 가슴을 어루만지는 무량한 햇살, 너였구나. 구름, 너였구나. 옛 이야기 지줄대는 가르마 같은 대지에 서서 풋풋한 봄내음, 부풀어 오르는 땅의 기운 살라먹는 뭉게구름, 너였구나.

 지금 우리는 슬프고도 고단한 시대에 살고 있다. 대통령이 파면되었고 중국은 사드 보복이고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위협하고 있다. 일본은 침략의 반성은커녕 제국주의 망령이 꿈틀거리고 미국은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자국의 이익과 보호무역주의로 세계를 긴장케 하고 있다. 경제도 불안하고 정치도 혼미하며 국제정세 또한 불확실한데 저마다의 욕망과 아집과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상처만 깊어가고 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을 때 길은 시작된다고 했던가. 봄 마중이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길을 나섰는데 자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랑자를 두 팔 벌려 반겼다. 복수초가 꽃대를 들어 올리더니 생강꽃이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고 산수유와 개나리도 대지에 물감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하얀 목련은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 올린다. 북풍한설을 딛고 피어나는 것들은 보란 듯이 마른 가지에 꽃이라는 희망을 하나씩 피우고 있는 것이다.

 꽃은 모든 식물의 성기다. 그러니 필 때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질 때도 아름다워야 한다. 발랄하고 선명한 것 같지만 시련을 딛고 새로운 사랑을 위해 향기를 피운다. 사람의 일도 그러하다. 사는 게 말이 아니라며 불평하고 거리에 가래침을 뱉을 시간이 있다면 얼음장 밑에서 새파란 봄이 솟아나는 기적을 만날 일이다. 그럴 것도 없이 뒷동산 소나무 숲에 잠시 서성거리자. 견딤이 쓰임을 만든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 절로 부끄러움이 밀려올 것이다. 

 다시, 똘레랑스와 노마디즘을 생각한다. 똘레랑스는 관용과 배려와 용서와 화해다.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타인의 아픔을 함께 나눌 줄 알고 타인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마음(Confession)이 필요하다. 노마디즘은 인식의 확장이다. 그 옛날 유목민들의 삶처럼 드넓은 평원을 온 몸으로 종횡무진하며 새로운 삶과 문화와 아픔을 허락했듯이 지구촌을 무대로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되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누구나 억눌림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갈망한다. 그러려면 비애의 역사를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성찰의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숲은 아름답고, 어둠은 깊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고 노래했다. 삶이 고단하고 내 마음에 먼지 가득할수록 자연의 유혹은 절박하다. 그렇지만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가야할 먼 길이 있기에 신발 끈 고쳐 매는 것이다. 숭고한 아름다움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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