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강 한국무형문화유산도자기명장

[이용강 한국무형문화유산도자기명장] 1905년 을사늑약과 그로부터 5년 후 한일합병을 거쳐 조선을 침탈한 일제의 첫 번째 전략은 오랜 세월 동안 받아온 한반도로 부터의 문화 역사적 영향력의 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조선 제3대 총독으로 사이토 마코토(?藤?)가 부임해 10년간 문화 통치란 미명으로 역사를 왜곡 날조하며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들의 조상에 무위 무능함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을 절반 일본인으로 만드는 지름길이다"라는 기치를 내걸어 엄청난 양의 역사서를 폐기하고 불태워 없앤다.

 심지어 그 시기에 일본도기 '일동상회'(후일 노리다케로 상호 변경)에서 생산된 일본 식기를 생산, 운반비의 반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정책적으로 수년간 판매한 후 조선의 도기 자기소의 수를 조사해 보니 거의 절멸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하니 문화 통치란 허울이 얼마나 가공할 파괴력으로 작용했는지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 백자 생산 시기는 일본보다 200여년 앞선다.

 당시 명을 다녀온 사신들이 백자의 필요성을 설파했고 세종대왕 때 예조의 예빈사 사옹원의 분원을 만들어 경기도 광주일원에 설치하고 종3품을 도제조로 삼아 백자를 번조케했다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으로 알 수 있는데 그 당시 최첨단 하이테크놀로지의 기술이 필요한 백자가 금방 구어진 것이 아니고 수많은 시험과정을 거쳐 세조년 간에야 완성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록에 보면 백자에 쓰이는 주재료 고령토를 얻기 위하여 경주의 벼랑 위에서 채토작업하던 인부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자흙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는 방증이다.

 이렇듯 어렵게 구한 백자토를 바닷길로 운반하여 남해를 돌아 한강하구 김포나루를 거쳐 남한강 지류를 타고 경기광주 번천리 일대에 이르는 대장정의 길에 오른 후에 솜씨 좋은 도공을 전국에서 서울역으로 차출하여 봄부터 가을까지 새경을 주고 백자를 빚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백자번조 기술을 일본은 필요로 했으리란 것이 불문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일본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침략해 수많은 도공을 강제 연행하였고 극진한 대접으로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조선의 도공들에 의해 일본의 이마리 백자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때 도공의 수장이 이삼평(李三平)으로 일본의 도조(陶祖)로 모셔지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명치유신을 통하여 일본이 발전되고 서양의 문물을 빨리 받아들인 그들에게 역전의 기회를 주어 일본의 백자 밥그릇 반상기를 통해 무차별 공격을 함으로써 조선의 도자산업 근본을 흔들게 한 것이다. 그럼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왜 이런 일을 감행하였던 것일까? 조선을 병탄한 일제가 조선에 진주해 살펴보니 역사적으로 일본이 우위에 있었던 적이 없고 늘 전수 받아간 기록들 밖에 보이지 않으니 통치 당위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미약했기에 왜곡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 첫 번째가 임나 일본부설이고 둘째가 광개토대왕비의 훼손이었으며 거슬러 올라가 위만조선설을 조작했고 그 이외에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작금의 현실을 직시하고 역사를 미래의 거울 삼아 다시는 왜국 일본에게 침탈당하지 않을 강건한 문화보국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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