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강 한국무형문화유산도자기명장

[이용강 한국무형문화유산도자기명장] 일본의 도로는 영국을 본따 만들어 우리와 반대로 좌측통행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뒤에서 좋은 외제차가 빠르게 다가오면 왼쪽 주행선으로 거의 모두가 비켜서는 게 일본의 국민성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역사속의 사건에서 찾아본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는 아직 황위에 오르기 전인 1891년 5월 황태자 신분으로 시가현(滋賀縣) 오츠(大津)시의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당시 세계 제1의 군사대국 러시아의 황태자를 보기위한 인파가 몰려 복잡한 와중에 츠다산죠(津田三藏)라는 순사가, 먼저 일본천황을 예방하지 않고 유람만 즐긴다는 이유로 옆구리에 차고 있던 장도로 니콜라이 황태자를 공격해 칼이 뒷머리를 스치는 정도의 경미한 부상에 그쳤고 순사는 바로 체포되었다.

 문제는 군사대국 러시아의 보복을 두려워한 일본정부의 비굴할 정도의 사과태도에 있었다. 사건직후 천황주재로 어전회의를 열어 범인처벌을 지시하였고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계엄령까지 선포하는 호들갑을 떠는가하면, 각 학교에 위문편지와 위문품을 보내게 했는데 위로전문이 1만 통을 넘어섰다고 한다. 강대국에 대한 일본의 굴종이 어느 정도였던가 짐작이가는 일이라 하겠다.

 또한 세계 제2차대전의 일본패전으로 일본에 진주한 맥아더사령관은 1951년 미국으로 귀환한 후 의회의 보고회에서 "일본인의 정신 연령은 13세의 미성년과 같았다"라고 평가했다 원폭 투하후 항복하고 완전 점령까지 미군의 희생을 30만 명까지 예상하였는데 의외로 선선히 항복하였으며 시내의 연도에는 많은 시민들이 나와 미군의 진주를 손을 흔들며 반기고 있었던 것은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게 됐다는 안도감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더욱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미군 상륙지인 요코스카항과 요코하마에 400여명의 여성들을 준비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들은 에도막부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라샤멘'이라 불리던 외국인 거류지의 유곽녀들이 중심이었지만 그중에는 일반의 부녀자를 지킨다는 의미로 내무성에서 전후 치안유지 목적으로 1억 엔을 배정하고 특수위안시설협회(RAA)를 설립하여 각급 경찰부 보안과로 공창가와 사창가를 돌며 업자들을 통해 재빠르게 위안부 조직을 갖추게 하였다 하니 맥아더의 일본인 정신수준 운운한 것이 이해되지 않는 바가 아니다.
 
 위의 두 역사적 사실만 보아도 일본이 강자에게 얼마나 굴종하는 민족성을 지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일본에서는 까만 썬팅을 한 벤츠가 '도로의법'이란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 이유는 조직폭력배인 '야쿠쟈'가 즐겨 타기 때문인데 어느날 앞차가 더디게 간다고 뒤에서 경적을 울린 차의 운전자를 권총으로 쏘아 죽인 폭력배 사건 이후로 경적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우리가 힘이 없어 당한 치욕의 역사를 돌아보고 다시는 그와 같은 능욕을 당하지 않게 하려면 우리 각자가 더욱 분발하여 맡은바 책무를 다하여야 하고 신성한 주권행사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대선의 중요함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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