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자 수필가

[한옥자 수필가] 마른 잎이 뒤덮었던 천변은 온통 초록빛이다. 이른 봄 싹이 날 때부터 매일 지나다니며 보았건만 처음 본 듯 새삼스럽다. 그동안 무엇을 보며 다녔던가. 눈은 보았으되 넋은 놓고 살았는가. T.S 엘리엇의 황무지란 시는 첫 구절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시작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황폐해진 유럽을 소재로 구성된 이 시는 죽음의 신 입장으로 볼 때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4월에 의해 자신이 소멸하는 것을 잔인하다고 묘사했다.
 
 죽음도 몰아낸 4월이 가고 계절의 여왕인 5월이 되었다. 그런데 5월은 더는 봄도 아니고 여왕도 아니었다. 30도를 웃도는 5월의 기온은 봄에게 휴무를 하라고 윽박지르는 기세다. 허겁지겁 여름옷으로 바꿔 입고 버스를 탔다. 두어 정거장을 지나가는데 앞자리에 앉았던 젊은 여자가 가슴에 아기를 품고 일어섰다. 내릴 정거장이 가까워져 온 모양이다. 그때 좌석 등받이에 가려 보이지 않던 아이 둘이 또 일어섰다. 아기 엄마는 두 아이를 채근하여 통로로 나오게 했지만 달리는 차의 흔들림은 서너 살의 오종종한 아이들이 몸의 중심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아이들을 잡고 두 손으로 부둥켜안고 있는데 건너편에 앉아있던 노인이 한마디를 거든다. "아이가 셋이나 되네!" 못 들은 척 서 있는 아기엄마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안 그래도 혼자서 아이 셋을 데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외출하느라 진땀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금쪽같은 자기 자식을 두고 숫자를 논하니 마음이 편할 리 있겠는가. 뒤늦게 이런 사람이 애국자라고 감쌌지만, 그녀는 묵묵히 아이들을 데리고 버스를 내렸다. 

 이 시대의 워킹맘과 워킹대디는 어쩌다가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었다. 필자도 그들과 다르지 않게 그렇게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 살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대부분이 다 그렇게 살던 때라 애써 피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런데 지금은 피한다. 결혼도 안 하겠다, 아이도 안 낳겠단다. 돈이 많아야 떳떳하게 자식을 키울 수 있는데 돈벌이가 어려우니 아예 그만두겠다는 말이다. 한국 부모는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불안과 죄책감이 많이 느낀단다. '내가 죄가 크다'는 말을 자라면서 어머니한테서 자주 들었던 것도 우리나라의 정서에 기인된 말일 것이다.

 한국전쟁 후, 우리나라의 경제는 120국에서 119위로 전락했다. 어쩌다 어른이 되어버린 10만 명의 전쟁고아뿐 아니라 북쪽에 고향을 둔 실향민과 남한의 모든 사람도 60년대, 70년대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고속성장 덕분에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라고 불린다.

 국민은 소통과 공감 부재의 나라에서 신음한다. 경제의 빈곤과 양극화로 나날이 힘들다. 마음이 답답해도 미세먼지 최악이라는 일기예보 때문에 창문도 마음대로 열지 못하고 갇혀 살다시피 한다. 경제 대국은 빛 좋은 개살구다. 대국은 아니더라도 마음 편히 살 수만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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