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강 한국무형문화유산도자기명장

영국의 유니버시티칼리지오브런던(UCL)대학 교정의 한 켠에 검은 오석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옆으로 길게 누운형태의 직사각형이 각별하여 눈길을 끈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보니 한자와 일본어를 섞어 쓰여져 있었는데 UCL대학에서 공부한 30여명의 총리급 일본인 명단으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가 첫줄에 기록되어 있었다.

 일본이 명치유신을 통하여 국가 통치의 틀을 근본부터 바꾸며 유럽의 체제를 본받자는 움직임에 주인공은 일본지폐 최고액권인  1만엔권의 초상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인데 탈아입구(脫亞入歐)론을 제창하며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을 벤치마킹 하면서 그들이 만든 흔적이 영국 최고의 대학교정에 비석으로 서 있는   것이다.

 지방영주제의 전국시대를 끝장낸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는 아들인 히데요리(豊臣秀賴)에게 권좌를 물려주려 하지만 히데요시가 먼저죽고 어린 히데요리측과 내전을 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에게 참패하여 오사카성이 불타면서 죽게된다.

 그 후 도쿠가와계에 의해서 황실의 일황이 무력화되고 상징적 존재가 되며 고려의 무신정권과 비슷한 정치체계를 갖추어 1603년 초대  도쿠가와 이에야스부터 1868년 15대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권좌에서 물러날 때 까지 265년간 에도막부를 지배한다. 이 도쿠가와막부 시기에 조선통신사가 12차례나 파견되는데 이들과 동행한 사옹원 분원의 관리도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자 번조의 기술 지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왕정복고를 주창하며 나선 하급 무사들 중심에 사쯔마번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있었는데 그에 의해서 명치유신이 시작되었으며 같은 시기 청나라에서는 영국과의 2차 아편전쟁이 끝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송,원,명,청 4개의 왕조를 통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도자기를 만들어 유럽으로 수출하였던 중국은 아편전쟁으로 생산시설이 파괴되었고 그틈을 타서 일본이 그 수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 당시 제대로 된 청화백자 한 점이 유럽의 집 한 채 값과 맞먹었다 하니 얼마나 귀한 것 이었을까 그 가치가 짐작이 간다. 그런 막대한 자금이 국가 개조 사업인 명치유신을 위해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명치유신 시작으로부터 20여년후인 1894년 청일전쟁과 10년 뒤인 1904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만큼 국력 신장의 뒷받침을 상당부분 도자기를 수출한 자금이 차지하였다는 것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항상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데 하나의 정권이 생성되어 발전하고 쇠퇴하여 멸망하기까지의 많은 예들을 보면 한결같이 초심을 지킨 왕조나 정치권력은 장수 하였으나 그렇지 못한 집단은 수명이 짧았다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다. 이제 새롭게 출발한 우리나라의 정치권 인사들도 이러한 사실을 꼭 기억하고 문화로 꽃피우는 당당하고 멋진 나라를 만들어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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