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의영 전 충청대 교수

[곽의영 전 충청대 교수] 오늘날 철학이라는 용어는 그 철학이 갖는 포괄성과 다의성(多義性)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 분명히 정의하기 어렵다. 이에 관해 동서고금의 여러 철학자들은, 철학(哲學)을 '인간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인생관(人生觀)과 세계관(世界觀)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과연 우주의 근원이 무엇이며,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라는 문제야말로 삶의 본질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철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유의 과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이나 우주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려면, 사유와 같은 정신작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유(思惟)란 '어떤 대상의 보편적·본질적인 것을 파악하는 이성적(理性的) 작용'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즉 모든 현상과 사물에 대해 "이것은 왜 그럴까?"라는 질문을 던져, 그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바로 '철학하는 태도'이다.

 뉴턴은 그 당시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거나 문제 삼지 않았던,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진다'는 그야말로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 '왜 땅으로 떨어질까'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만유인력(萬有引力)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주변의 현상들이 다 그렇고 그렇다는 타성에 젖어 사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설사 어떤 중요한 의문이 생기더라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그 순간 그치고 말기도 한다.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의문을 가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실 철학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질문을 거듭 던지며 해답을 찾아가 보는 것이다. 무릇 '철학하는 삶'은 우리를 '타인의 삶'에서 '자신의 삶'으로 이끌어 준다. 이것이 진정한 주체적 삶이요, 자신의 삶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철학이라 하면, 한가한 사람들이나 즐기는 지적(知的) 유희(遊?)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철학은 갈수록 물화(物化)되어가는 세상에서 황폐해진 정신적 가치를 회복시켜 줄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으며, '인간다운 삶'과 보다 '성숙한 삶'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유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 다음 내가 지금 어느 지점에 서있는지 '위치'를 바르게 파악해야 된다. 현재 위치를 알려면 현재의 일에서 한 발 비켜나 보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위치가 더 잘 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나는 과연 어디로 가야 되는가, 즉 '삶의 방향성'을 가늠하기가 쉬워진다. 삶의 방향성은 여러 길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방향을 선택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일단 삶의 방향이 정해지면, 다음은 살아가는 '속도'의 문제이다. 과속을 하면 사고가 나고, 속도부터 내면 자칫 목적 없는 삶이 될 수 있다. 목적지가 없다면 그 길로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 삶의 시작은 바로 '철학이 담긴 삶'이다. 부디 철학을 만나 지혜롭게 행복하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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