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강 한국무형문화유산도자기명장

[이용강 한국무형문화유산도자기명장] 일본은 19세기 중엽에 시작된 명치유신을 통하여 새로운 통치 체제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유신의 시작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강제 개국이 되는 것이다. 그 시발점은 1853년 동인도 함대의 M.C. 페리 제독이 일본으로 미국 대통령의 개국(開國) 요구 국서(國書)를 가지고 왔을 때이며 이때 유신의 싹이 텄고, 그 다음해에 미·일 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 조약은 칙허 없이 처리한 독단적 처사였으므로 왕정복고세력이 일어나 막부와 대립하는 격동을 겪었다.

 그러다가 700여년 내려오던 막부가 1866년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통하여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그 이전까지는 막부정권의 그늘에서 실권 없이 상징적으로 존재했던 왕실과 왕권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명실상부한 주권을 잡게 되고 정부는 학제·징병령·지조개정(地租改正)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탈아입구(脫亞入?)를 내세워 국가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는 관주도(官主導)의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여 새 시대를 열었다.

 이 명치유신으로 일본의 근대적 통일국가가 형성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성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가 개시되었으며, 사회·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또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천황제적 절대주의를 국가구조의 전 분야에 실현시키게 되었다. 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구미에 대한 굴종적 태도와는 달리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강압적·침략적 태도로 나왔다. 1894년의 청일전쟁 도발, 1904년의 러일전쟁의 도발은 그 대표적인 예이며, 그 다음 단계가 무력으로 조선을 병합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명치유신의 주역들이 배출된 초라한 어촌의 다다미방 쇼카손주쿠(松下村塾)는 아이러니하게도 임진왜란 때 강제로 끌려간 도공의 정착지인 야마구치현 하기(萩)라는 마을에 있었으며 임란 후 초대 도자기촌의 하나인 하기야키(萩燒)본장에서 명치유신이 발화되는 것이다. 여기에 중심역할을 한사람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인데 그의 제자 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바로 이 지역 출신이다.

 사백여 년을 이어 온 하기도자기의 창시자는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도공 '고오라이자에몬(高麗左衛門)'이다. 그들의 후손이 그 기술을 계승 발전시켜 중국과 조선을 능가하는 도자기를 빚어내게 되는 데는 일본 정부의 뒷받침이 지대하게 작용한 덕분이라고 본다. 하기야키의 찻그릇은 고려시대의 정호다완(井戶茶碗)과 거의 비슷한데 초기 찻그릇 중 '히바카리'라는 그릇은 흙과 유약을 조선에서 가지고 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엔 강제 연행 당한 여파로 비협조적이었던 도공들은 관청의 극진한 대접과 땅과 재산을 내주고 노비까지 딸려주어 자기번조를 독려한 결과 명치유신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막대한 자본을 도자기수출 대금으로 충당케한 사례는 타산지석으로 삼아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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