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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의 언어로 말하기
유인순  |  news@ccdail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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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03.05  19: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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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인순
휴일 아침 일찍부터 남편이 부산하다. 종일이라도 누워있을 사람이 연장 박스에서 낫과 톱을 챙기고 작업복을 입었다. 일요일만이라도 실컷 자 보고 싶은 나는 죽은척하고 자야하나 말아야하나 눈치를 살폈다.

남편은 혼잣말처럼 고향 산소에 가야겠다고 한다. 전근을 갔으니 어머니 아버지께 인사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에 나도 부랴부랴 간편복으로 갈아입었다. 함께 가겠느냐고 묻기 전에 나도 가겠다고 나서야한다는 걸 안다. 시집살이 삼십년에 일찌감치 터득한 삶의 요령이다. 따라나서겠다고 하자 '산에 가보아야 할 일도 별로 없는데 집에서 쉬라'고 빈말을 하다가 쌀쌀하니 옷이나 잘 챙겨 입고 양지쪽에서 놀다가 오려면 가자고 못이기는 척 응수한다.

"당신은 전근 갔다고 인사하고, 나는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고 신고하면 되겠네요." 입학금을 내고, 일박이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갔다 왔어도 남의일 보듯 일부러 무관심한척하는 남편에게 쐐기를 박는다. 맞벌이 하지 않고도 사모님이 재테크 잘해서 큰 아파트도 장만하고 게다가 자식 잘 키워 자식에게 용돈도 탄다는 동료교사가 부러워 사모님 칭찬에 남편 입이 마를 때, 나는 환갑에 고입검정고시로 시작해 70세에 대학원 졸업하고 창신대학 겸임교수가 된 송순동할머니 사진을 인쇄해서 닮고 싶은 인생이라고 대꾸한다. 남편이 하고 싶은 말을 내가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남편이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술 한 잔 부어놓고 절을 했다. 먼 길 출퇴근 할 아범 안전을 기원하며 시집와서 끝까지 공부할 수 있게 해주어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한다. 남편이 죽은 나무를 베고 얼크러진 한해살이 넝쿨을 낫으로 쳐내며 산소주변을 정리 할 때 한쪽 비탈 양지에 앉아 남은 술을 따라 마시고 곶감 한 입 베어 물었다. 촉촉하고, 말랑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에 착 붙는다.

찬 술이 몸을 호로로 덥힌다. 호미를 들고 비알 밭으로 향했다. 지난가을 갈아엎은 두둑 양지에 햇 냉이가 드문드문 보였다. 묵은 풀 하나 없는 깔끔한 농부의 밭이다. 봄을 맞으러 부풀어 오른 흙이 냉이를 밀어 올려 손으로 잡아 당겨도 쑥 쑥 뽑혔다. 흙속으로 바람구멍이 송송 뚫렸다. 그 통로를 통해 흙속에 묻힌 씨앗들이 봄 냄새를 맡고 저마다 각각의 모습으로 고개를 디밀리라. 트럭한대가 지나간다.

"유리 갈아 끼우세요, 현관문 고치세요, 차단스 고쳐요." 천천히 동네를 돌아 나오던 트럭이 밭 끝에서 멈추어 섰다.차단스라는 말이 낯익다. 서랍장이나 옷장 등을 지칭하는 말로 일본어에서 유래된 말인데 어려서 내 어머니가 쓰던 말이었다. 이미 거의 쓰이지 않는 말로 도시에서는 알아들을 사람이 별로 없을듯한데 할머니들이 많은 시골 동네에서 반복되는 그 소리를 들으니 상대방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시집와서 대학졸업하고 박사과정에 입학한다는 것은 배우자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수업료를 누가 내던 상관없이 내가 박사과정에 입학한 것은 송할머니 가족들이 그분을 지지해 주는 것 이상으로 남편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내가 집 밖으로 나와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아이들이나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더 도움이 되고자함이니 재테크를 할 줄 몰라 모아놓은 돈이 없다 하더라도 부동산투자로 재미를 본 사모님 마음만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가 기억하는 언어로 감사표시를 하고 싶다. 그런데 말을 할 때는 서로 청개구리처럼 빗나간다. 내가 그의 마음을 읽어주지 못하는데 그가 어찌 내 맘을 읽어 줄 수 있겠는가.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묻는다. "무슨 학과야?, 그거 마치면 뭐 하는 건데?" "늙도록 돈 많이 벌수 있는 학과, 노인복지상담 이예요" 그러다가 또 빗나간 것은 아닌지 남편 안색을 살핀다. 공책이라도 한권 사주며 잘해보라고 하길 바라지만 입학선물 사달라고 말하는 건 끝까지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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