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탁 충북보건과학대 교수

[김종탁 충북보건과학대 교수] 괴테나 베토벤이 살았던 시대는 각박한 오늘날 현대사회에 비하면 참으로 사람이 살만한 사회였던 것 같다. 전체 사상이나 문학작품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들은 인간의 삶이 회색임을 알고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신의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그 시대의 인생의 멋과 낭만은 각박한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부럽고 동경의 시대로 느껴진다. 삶에 보람과 희망을 주는 사랑과 우정, 신의가 없다면 인생은 무지개 빛깔이 아니라 흑색이 될 것이다.

 각박한 현대사회에 이러한 개념들은 오래전에 변질되었거나 퇴색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인생을 살맛 없게 만든 것들이 어느 사이에 우리의 주변에도 깊숙이 스며들어 이제는 뿌리 깊이 자리를 잡은 듯싶다. 변절과 배신, 불신과 반목은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절시켜 놓았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 사이를 갈라놓고 인격 대 인격의 진정한 만남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말았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허물이 있고 내 얼굴은 볼 수 없게 마련이다. 나의 허물은 작고 상대의 허물은 클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허물 역시 상대적이기에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작은 허물이 상대가 생각하기에는 치명적인 큰 허물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생각하는 상대의 큰 허물이 상대가 생각하기에는 작은 허물일 수도 있다. 더 확장해 생각해 보면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점이 상대에게는 큰 허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허물을 달리 생각해보면 참 다행스럽기도 하다. 내가 허물을 가지고 있기에 허물이 있는 '너' 또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허물이 없다면 허물이 있는 상대를 이해할 수 있을까. 허물 있음은 불완전함 속에서 완전함을 만들어 준다.

 익히 알고 있는 얘기 중에, 기원전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초상화를 부탁받은 어느 화가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왜냐하면 대왕의 이마에는 추하기 짝이 없는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는 대왕의 상처를 그대로 화폭에 담고 싶지 않았다. 대왕의 자랑스러움에 손상을 입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를 그리지 않는다면 그 초상화는 진실된 것이 되지못하므로 화가 자신의 신망은 여지없이 땅에 떨어질 것이다. 화가는 고민 끝에 대왕의 이마에 손을 대고 쉬고 있는 모습을 그려야 되겠다고 다짐을 한다.

 그렇다. 타인의 상처를 보았는가? 그의 허물을 가려줄 방법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화가의 지혜로움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의 허물을 들추기보다 가끔씩 덮어주는 모습은 진정 아름답다. 아무리 사람냄새 사라진 각박한 세상살이라 할지라도 남의 작은 허물을 집요하게 침소봉대하여 증오심을 부추기고 끝까지 상대의 약점 찾기에 혈안이 돼 파멸시키려는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므로 인간사회는 언제나 '나와 네'가 동시에 성립하는 '우리'로서 살아야 가치 있는 삶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극단적 비극은 '우리'라는 의미의 중요성을 망각한 데서 모든 갈등과 반목이 싹튼다. 나와 다른 것은 용서할 수 없고 참아주지도 못하는 우리의 옹졸함이 모두에게는 가해자이고 피해자인 셈이다. 세상 사람이 모두 나와 똑같을 수는 없다. 언제나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정서가 퍼져나갈 때 참으로 살맛나는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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