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부분 살아가면서 적지 않은 후회를 한다.

그런 후회의 뒤 끝에 사람들은 대개 다시 세월을 거슬러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이런 사람들의 생각을 투영하는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벤자민 버튼은 애초부터 노인의 육체와 정신을 갖고 태어났다.

전체 러닝타임이 166분에 달하는 긴 서사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 이 영화는 지루하다는 일반 관객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꽤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의 뉴올리언즈를 탄생의 배경으로 삼은 이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수많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생이 그렇듯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수많은 변화를 겪는 삶 속에서 그 변화의 조짐을 만나게 되고, 그 조짐은 대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80세의 몸과 마음으로 인생을 시작한 벤자민 버튼은 아버지에 의해 버려진다. 그런데 그가 버려진 곳은 양로원이고 그 양로원에서 그를 애지중지 맞아주는 것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 그것도 흑인이다.

낳아준 어머니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길러준 흑인을 어머니로 여기며 사는 벤자민 버튼은 태어나서 자라고, 성장하며 늙어가는 보통의 궤적이 아닌 갈수록 젊어지는 인생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벤자민 버튼은 선원이 되어 바다와 강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삶을 이어간다.

생명의 근원으로 물을 택한 까닭도 있겠으나,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인생의 질곡을 말하는 대지의 굴곡과 험준한 산에 관한 이야기와 장소 설정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 즉 인생의 처음과 끝은 결국 다 비슷한 것인가.

당연히 갈수록 늙어가는 한 여자를 만나고, 그럴듯하게 갈수록 젊어지거나 어려지는 벤자민 버튼의 어쩔 수 없음은 결국 인생의 수미상관법과 다름 아니다.

인생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사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전개한다.

다만 늙은 몸과 마음으로 시작해 다시 아기의 몸으로 죽어간다는 시간의 관념을 뒤집은 상상력을 제외하면 그저 우리의 일상과는 다른 시간의 흐름에서 조우하게 되는 뜻밖의 사건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주인공 벤자민이 뒤늦게 친아버지를 만나면서 '버튼'이라는 성을 갖게 되는 시점의 상징성은 단순히 단추공장이라는 설정을 뛰어 넘는 인생의 누름단추로써의 '시작'이라는 명제에 대한 의미를 엿보이게 한다.

이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뉴올리언즈를 향하는 태풍 속에서 회상의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태풍이 몰려오는 와중에서도 죽음을 앞둔 인생을 차분히 회고할 수 있다는 역설, 그 거꾸로 가는 시간의 관념은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인생을 관조하는 힘을 지닌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위대한 게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한 남자의 욕망과 그 분출구로써의 여인 데이지를 통한 희망과 절망의 절절함이 배어있는 소설 '위대한 게츠비'는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서사극이다.

이런 서사적 상황을 이끌어 내고 있는 문학작품이 문화산업의 척도로 가늠되는 영화와 만나면서 관객의 관심을 끄는 것은 결국 원작이 갖는 이야기의 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소설은 힘이 없고, 게다가 인생을 통한 역사적 서사의 전개도 쉽지 않은 현실에서 원작의 풍부함과 다양성은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런 상상력과 창의성이 문화산업을 통한 삶의 가치 향상이 가능할 것이다.

▲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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