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포도산업의 빛과 그림자 1 충북 최초 재배지 용운리

▲ 충북 옥천군 동이면 정귀영 용운포도작목반장이 마을회관 벽면에 걸려있는 옥천포도 원조마을 표지판을 가르키며 설명하고 있다.

[옥천=충청일보 이능희기자] 한·칠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후 충북 옥천지역 포도농가들의 위기감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칠레산 포도에 이어 미국산과 페루산 까지 국내시장을 빠르게 잠식하면서 포도가격이 급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2014년 칠레산 포도 관세가 완전히 철폐됐고, 지난해부터는 미국·페루산 마저 무관세로 수입되고 있다. 포도농가의 미래가 암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본보는 3회에 걸쳐 옥천 포도산업의 현주소와 새로운 돌파구는 없는 지 점검해 본다.

"1970년대 서울로 출하하는 물량이 전국에서 1위였지. 포도가 익기도 전에 전국에서 장사꾼들이 몰려들어 밭떼기로 사갔었지."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용운리)에서 포도농사 '선구자'로 통하는 정달영씨(71)는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용운포도'의 자부심을 이렇게 드러냈다.

1943년 정씨의 부친인 정종택씨가 인근 대전에서 포도농사를 짓던 일본인 농장에서 묘목을 얻어와 충북도내 최초로 노지포도 재배를 시작했다. 그 당시 벼, 보리, 밀 농사만 하던 주민들이 묘목 구하기 쉽고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는 포도농사가 농가 소득에 크게 기여했다.

이 마을 150가구 가운데 125농가가 포도농사를 지을 만큼 인기가 높았다.

1970년대 중반에 시멘트 기둥에 철사를 엮고 비닐을 씌워서 시설재배를 시작했다. 이 역시 도내 최초다.

현재 옥천지역 시설하우스의 표본이 됐다.

시설재배 초창기에는 재배기술과 경험 부족으로 실패를 거듭하는 등 시련을 겪었다.

그 후 톱밥, 폐유를 이용해 가온(온도를 높이는 것) 재배를 시작했고, 1kg짜리 12개를 넣은 골판지 포장재 1상자 당 그때 돈 23만원을 받고 출하해 고소득을 올렸다.

이 지역 시설포도는 노지포도보다 50여일 빨리 수확해 전국 시세를 좌우할 정도였다.

1980년대 초 민경술 현 옥천군의원은 전국에서 제일 먼저 품질이 우수한 포도를 수확, 4배에 가까운 소득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같은 명성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옥천 시설포도밭 견학이 줄을 이었다.

소득 면에서 다른 지역 농가보다 월등하다 보니 옥천군내 전체로 퍼져나갔다.

현재는 시설 포도 주산지가 됐다.

시설 포도 재배면적도 전국 2위에 올라 있다.

이 지역 포도는 일조량이 풍부하고 주야간 일교차가 큰 기후조건 등으로 착색이 잘되고 당도가 높다. 7년 연속 국가브랜드대상을 받았다.

1969년 옥천군 최초로 세산포도조합이 설립돼 포도를 생산, 출하해 서울 등 전국시장에서 '옥천명산 용운포도'라는 명성을 얻었고 그 후 '용운포도회'로 명칭을 바꿔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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