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회 청주시 오근장동장

[김복회 청주시 오근장동장] 멀게만 느껴졌던 퇴직이라는 단어가 요즘 부쩍 가까이 다가왔다. 그 많던 시간, 희로애락과 부침을 거듭하면서 오늘까지 오게 되었다. 퇴직을 앞두고 40여 년 동안 열심히 일한 필자 자신에게 소중한 선물을 하고 싶었다.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앞으로 나와 함께할 멋진 공간을 선물하기로 했다.

 필자는 아파트보다 주택이 좋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예쁘게 꾸며 인생 2막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코자 대수선을 시작했다. 살림살이를 정리하는데 의외로 짐이 많았다. 그동안 쌓아 놓은 물건들이 어지러울 정도로 많고, 평소 사용하지 않던 물건까지 꺼내놓으니 여간 많은 게 아니었다. 사용하지 않을 것들은 과감히 버리기로 하자 어머님은 영 못마땅한 눈치시다. 한번이라도 더 쓸 물건이라며 아까워하신다. 필자와 동서들이 시집올 때 해온 솜이불도 있고, 사용하지 않은 그릇도 많다.

 어머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알게 모르게 모두 버렸다. 벽에 걸었던 사진과 그림들도 동생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다. 시계도 주방에 하나만 걸어 거실과 방에서 다 볼 수 있게 하고 거실에는 아무것도 걸지 않았다. 옷도 몇 년 입지 않은 것들은 모두 버렸다. 옷장을 정리하고 나니 남은 옷들이 그제야 가지런히 제 모양 제 빛깔로 폼을 잡고 있다. 버리길 참 잘 했지 싶다. 많은 것을 버렸지만 버리기 싫은 것이 있었다. 바로 책이다.

 책이 좋아 모으다 보니 서가가 빼곡하게 빈틈없이 꽉 찼다. 필자가 구입한 것도 많지만 선물로 받기도 하고, 남들이 버린 책도 가끔 주어 오곤 했었다. 책은 그동안 한 번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버려야 더 담을 수 있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몇 자루를 버렸다. 아끼던 책이 폐품으로 버려지는 게 마음 아팠지만 채움보다 비우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다.

 건축가 승효상은 조선시대 왕들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가의 사당인 종묘정전의 아름다움은 정전자체의 시각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전 앞의 비움 공간이 주는 비물질의 아름다움에 있다고 했다. 또한 도시와 건축의 아름다움은 채움에 있지 않고 비움에 있다고도 했다. 소설가 김홍신도 대나무가 가늘고 길면서도 모진 바람에 꺾이지 않는 것은 속이 비었고 마디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속이 빈 것은 욕심을 덜어내어 가슴을 비우라는 뜻이란다. 또한 사람마다 좌절, 갈등, 이별 같은 마디가 없으면 우뚝 설수가 없다고 했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틈이 있어야 비집고 들어갈 수가 있고, 빈자리가 있어야 누군가 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버리는 연습을 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필요 없는 물건도 쌓아만 놓았지 버릴 줄을 몰랐다. 이제부터라도 버리는 연습을 하며 살고 싶다. 정리를 하고 나니 주방의 그릇들도 눈에 잘 들어와 찾기 쉽고, 옷장 속에 옷들도 손에 잘 잡히니 좋다. 적게 버리면 적게 얻고, 많이 버리면 많이 얻고, 아예 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하였으니 욕심을 내려놓고 비워야겠다. 오늘도 나만의 소중한 비움의 공간에서 더 내려놓는 인생수업을 시작해야겠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