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강 한국무형문화유산도자기명장

[이용강 한국무형문화유산도자기명장]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1867). 일본을 열고 세계로 눈을 돌린 명치유신의 주역, 그는 고치(高知) 사람이다. 그는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끌고 온 검은 증기선 구로후네(黑船)가 개국을 요구하러 에도 앞바다 우라가(浦賀)에 떠있었고 그곳에 개항파 거두인 가츠 가이슈(勝 海舟)가 있음을 알고 암살하러 바닷물 속으로 혈혈단신 잠입하여 목에 칼을 겨누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성품에 감복해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심복이 된다.

 그 당시 일본은 무신정치를 근간으로 왕은 상징적으로 뒷전에 있었고 막부의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이 전권을 가지고 7백여 년을 무인들이 통치해오던 막바지 시기였다. 백성들 사이에  많은 불만이 팽배해 있었고 정정이 불안하였으므로 료마의 활약은 더욱 빛이 났으며 후일 서구유럽에 버금가는 발전을 보이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그의 활약 중 최고의 화룡점정은 1866년 정월 교토에서 삿초동맹(薩長同盟)을 성사시킨 것이다. 토사번(土佐藩) 하급무사 출신의 료마(龍馬)가 특유의 친화력으로 당시 앙숙관계였던 조슈번(長州藩:현재의 야마구치현)과 사쓰마번(薩摩藩:현재 가고시마현)을 화해시키고 나아가 연합하여 막부를 무너뜨리고 왕정을 복원케 하는 업적을 남긴 것이다.

 이때 1873년 이소노카미(石上)신궁의 대궁사(大宮司·신궁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부임한 간 마사토모(菅政友)가 신궁에 모셔져있는 백제의 근초고왕 때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의 몸체에 금으로 입사된 명문을 찾아낸다. 칠지도 내용 중에 앞면 34자, 뒷면 27자 총 61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앞면 8자 뒷면 5자가 그때 지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에서 왜왕에게 헌상하였다고 주장하는 논거를 만들고 역사를 왜곡하여 왕정복고의 당위성을 생산한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정권 구축을 위해 애쓰던 료마는 1867년 11월 15일 교토의 오우미야에서 수구파 막부쇼군의 미마와리구미(見回組)에게 습격당해 33세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기에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에서 '근대 일본의 길을 연' 국민적 영웅으로 평가 받는다. 이에 따라 그에 관한 과장된 이야기 또한 많은데 시대별로 영화가 여러 편 만들어졌으나 그가 검술의 달인이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불분명하며 허풍이 심한 성격이라는 평가도 있다.

 또한 그의 고향 시고쿠 고치에서 가까운 도쿠시마현(德島?) 나루토시(鳴門市)에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도자기 판화 전문 오츠카(大塚)미술관이 있다. 유명한 오츠카 제약회사 사장 형제가 1971년부터 연구해 만들었는데, 세계의 명화 네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부터 피카소의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그린 '게르니카'까지를 실물크기로 도판(陶板)위에 2만 가지 도자안료를 개발해 원색에 가까운 그림으로 재현해 냈는데 직접 붓으로 그린 것도 있지만 명화를 사진으로 찍어 전사지로 도판에 전사해 만들어 건물 한쪽 벽면을 차지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압권이다.

 약 1000여점의 명화 작품을 2만4천여 평의 전시공간에 선보이는 거대한 오츠카 미술관은 고베(神戶)에서는 차를 타고 아와지시마(淡路島)를 거쳐 연육교로 갈 수 있으며 오사카에서도 바다건너 보이는 곳으로 배를 타면 멀지않게 갈 수 있으므로 여행할 만한 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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