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이향숙 수필가] 그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누군지 모르겠다. 기억을 더듬거려 보았지만 생각나지 않는다. 무안할까싶어 아는 척을 했다. 그러자 가족의 안부까지 묻는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후일을 약속하며 헤어질 때 까지도 그 여자가 누구인지 기억해내지 못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그의 존재가 드러났다. 반백년을 살아내는 동안 내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사업적인 일이어서 금전적인 손해도 크게 봤다. 그 일로 오랫동안 밥맛을 잃고 깊은 잠을 이룰 수 없는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 믿음이 깊었기에 상처도 깊었다. 죽는 날까지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잊는다는 것은 죽어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그녀를 내가 알아보지 못했다.

 어쩌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기억 속에서 그를 지워내려 애썼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것은 본인이 더 고통스럽기에 용서하려 노력했지만 쉽게 되지는 않았었다. 강산이 변하고도 어느 만큼의 세월이 흐르고 측은지심이 느껴졌다. 용서와 분노의 수레바퀴가 아찔하게 돌아가며 굉음을 내었다. 마모된 바퀴에서 못이 튕겨져 나가고 천 길 낭떠러지 앞에서 아스라이 멈추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를 온전히 용서하지는 못했지만 이해하려는 마음이 서고서야 마침내 내가 편안해진 것이다. 얼떨결에 시퍼렇게만 보이던 망각의 강을 건너게 되었나 보다.

 날카로운 칼날 같은 감정들이 무뎌지고 나 또한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의도하지 않았으나 존재만으로도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지옥도 천국도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가 저지른 일도 나의 관리부족으로 벌어진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을 너무 믿고 그것을 미덕이라 여긴 스스로를 반성하고 그를 용서하므로 비로소 내가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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