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강 한국무형문화유산도자기명장

[이용강 한국무형문화유산도자기명장] 지금으로부터 6천 년 전의 신석기시대 말기에 구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형 토기에는 푸른 옥이 눈동자로 박혀진 여신상이 랴오닝성 차오양시 뉴허량(牛河梁) 여신묘에서 1984년에 출토되었다. 흙으로 빚은 여신의 얼굴상은 국가1급문물로 지정되어 랴오닝성고고연구소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2년 64건의 금지출국전람문물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지금의 산동성 부근에 은나라 유적에서도 다량의 토기파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두 지역 모두 고조선의 영역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 뒤를 이어 주나라 때에 초기적 유약이 시작되었으며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와서 제대로 된 가마에서 유약이 발린 경덕진 도요지 생산품이 보여 진다. 이시기에는 나뭇재가 유약을 녹이는 융제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자연유약이라 부르는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의 병마용(兵馬俑)으로 유명한 진(秦)나라의 도기는 시황의 여산릉(驪山陵)에 3개의 용항(俑抗)에서 도제수레100여대 도마(陶馬)600체 무사(俑)약8000점이 동쪽을 바라보며 서있는 장대한 위용은 최초의 통일왕조로서의 위상을 보여주기 충분하다. BC206년에 시작된 한(漢)나라 때에 초기청자가 1200도 이상의  온도에서 구어 졌으며 구하기 어려운 옥기(玉器)를 대신하여 비슷한 색의 청자가 부장품으로 쓰였다.

 백자의 탄생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북조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때  양질의 카오린(高嶺土)이 태토로 사용되어 비약적 발전을 보인다. 이때의 소성온도는 1300도 부근까지 올린 것으로 보여 지는데 초기백자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수(隋)나라의 청자는 푸른빛깔이 유려한데 소성시 갑발을 덮어 구었기에 환원염이 골고루 감돌아 청자의 색감을 좋게 하였다.

 역사상 가장 화려한 발전을 보인 시기는 당(唐)나라 때인데 월주요(越州窯)의 청자가 최고급품으로 등장한다. 또한 부장품으로 당삼채(唐三彩)가 인기가 높아 후장(厚葬)용으로 쓰였고 상저우(邢州:형주)백자 또한 많이 발전하여 대량 생산되었으며 한반도와 왜국 인도와 페르시아 그리고 이집트 지역의 유적에 이르기까지 당의 도자기가 발견되는 것이다.
 
 송(宋)대 도자기의 꽃은 휘종 때 피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가 갠 뒤의 하늘빛을 표현하기 위해 마노, 비취, 옥 등의 보석을 갈아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중 여요(汝窯)는 으뜸으로 휘종 때 만들어진 관요이며 균요(鈞窯) 가요(哥窯) 관요(官窯) 정요(定窯) 등이 유명한 가마터로 알려져 있다. 원(元)은 몽고가 세운 나라로서 흰색을 선호하였으므로 경덕진(景德鎭) 가마에서 고령토로 백자를 많이 생산했는데 페르시아 지방에서 생산된 고가(高價)의 코발트안료인 청화를 사용해 청화백자를 만들었으며 동반해 들어온 연당초 문양도 이슬람문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명(明)의도자기는 청화백자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역시 경덕진(景德鎭) 가마에서 주로 번조되었다 특징은 굽 안쪽에 제작연도의 표시로 명왕조의 연호가 들어간 것이다 서구유럽의 주문품도 다량 생산한 시기로 백자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청조(淸朝)의 초기에는 도자기를 유럽으로 수출하였으나 아편전쟁에 패한 이후로 쇠락하였으며 그 위치를 일본에게 빼앗기게 되어 도자기 최대수출국의 지위를 내려놓게 된다. 이와 같은 역사를 가진 중화인민공화국의 도자기는 생산량의 방대함과 규모면에서 세계 최고라 할 수 있으나 예술철학 면에서는 우리나라의 도자기와 자웅을 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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