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전 청주고교장·칼럼니스트

[김재영 전 청주고교장·칼럼니스트] 국내외의 어려운 정치상황 속에 광복절을 맞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일제의 강점기 36년, 우리는 이름도 성(姓)도 빼앗기는 창시(創氏)개명의 수모를 당했고, 남자는 강제 징병(徵兵)이나 징요(徵用) 으로, 여자는 정신대로 끌려가는 등 젊음과 목숨까지 빼앗기는 질곡(桎梏)의 세월을 보냈다.

 아버지께서는 한일합방 전 사천현감을 지내신 할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시어 청빈한 양반가(兩班家)에서 가난한 젊은 시절을 보내셨고, 광복직전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형제를 남겨두고 관부연락선에 몸을 싣고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으신 채 강제 징병(徵兵)으로 사지(死地)로 끌려가셨다.

 광복 후에는 천우신조로 조국으로 돌아오셨지만 강대국의 뜻에 따라 남북분단의 아픔 속에 국군으로 입영하시어 군복무를 마치시게 되고 어머님께서는 여러 남매를 데리고 가정을 이끌어 가셔야 하는 어려운 세월을 보내셨다.

 6.25전쟁 중에는 공무원이셨든 아버지께서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둔 채 부산까지 피난을 하셔야 했고 어머님께서는 어린 자식들과 공산치하에서 동가식서가숙하며 생활하는 중에도 가족 모두가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다행이었다.

 이제 아들과 손자가 군복무를 마치는 모습을 지켜보시며 노후를 보내시는 아버지의 주름지신 얼굴에서 굴곡의 한국사의 단면을 보게 되다 자식들의 곁을 떠나신지 11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우리는 900여회에 걸친 외침을 받아왔고, 일제치하에서는 나라를 빼앗긴 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태극기를 달지 못하고 일장기(日章旗)를 가슴에 단 채 금메달을 받아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과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했고, 율곡 이이 선생은 10만 양병을 주장했건만 우리는 미리 대비하지 못한 채 외침에 시달려야 했고, 심지어는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해왔다.

 부모님께서 살아오신 길을 반추하노라면 한국사의 단면을 되돌아보는 듯하다. 수난의 역사 속에 우리 가족이 무사히 오늘을 맞게 된 것은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가족을 잃은 이웃들의 아픔을 바라보며, "지난 일을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고" 다시는 이 같은 역사적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다함께 노력하기를 바라며 광복절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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