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한여름 밤, 도시의 골목길은 낮고 느리다. 오랜 가뭄 끝에 찾아온 기습폭우와 긴 장마와 푹푹 찌는 더위로 사람도 도시도 모두 지쳐있다. 바다로 계곡으로 여름 여행을 떠나는 것조차 사치가 돼 버렸으니 내 마음에 작은 쉼표를 만들 수 있는 삶의 여백이 필요하다. 지붕 없는 박물관에서 즐기는 달빛여행, 별빛여행. 남루한 도시의 골목길을 자박자박 걸으며 천 년의 숨소리를 듣고 근대문화의 아픈 기록을 엿보며 삶의 향기를 찾는 것이다. 오늘 하룻밤은 자연인으로 돌아가 노마디즘을 실천해보자. 이름하여 '청주야행, 밤드리 노니다가'와 함께하는 한여름 밤의 여행이다.

 청주야행에는 12개의 유산이 있다. 청주 관아에서 가장 오랜된 2층 누각 망선루,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본영을 드나들던 출입문의 문루(門樓)인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외세에 맞서 조선의 자주성을 외치던 그 날의 함성을 담은 척화비, 목은 이색과 고려 충신들의 목숨을 구한 900년 은행나무 압각수, 청주 동헌 목사의 집무실이었던 청녕각, 1000년 넘도록 청주를 지켜 온 주성(舟城)의 돛대 용두사지 철당간이 있다.

 이와 함께 근대 산업화시기의 충북 공산품 전시장이었던 구 청북산업장려관, 충북 행정의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건립된 충북도청 본관, 일본과 서양 건축양식을 접목한 우리예능원, 옛 도지사 관사로 사용되었던 충북문화관, 조선시대 충청도 선비를 양성했던 교육기관 청주향교, 한옥을 입은 서양식 예배당 성공회 성당도 청주야행의 소중한 보물이다.

 신비롭게도 이곳의 골목길 풍경은 세월이 지날수록 무르익고 있다. 공간은 역사를 낳고 사랑을 낳는다고 했던가. 남루한 그곳에 세월의 잔상과 대지의 신비와 공간의 내밀함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사람들 가슴속에서 잊혀져가고 사라져 갈 때도 골목길 풍경은 저마다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조금씩 익어가고 있었다. 까치발만 뜨면 골목길의 풍경과 추억이 온 몸으로 밀려오고 수십만에 달하는 내 안의 세포가 하나씩 요동치기 시작하는데, 노래라도 부르고 싶고 춤을 추거나 시를 읊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주인 없는 어둠의 마당에 앉아 차라도 한 잔하며 별밤지기가 되고 싶었다.

 그렇다. 중앙공원과 서운동, 탑대성동, 우암동, 내덕동으로 이어지는 청주의 골목길은 낮고 느리다. 1500년 청주의 살아있는 역사다. 일제와 근대의 아픔과 고단했던 삶을 간직하고 있다. 청주야행에서는 이들 공간 중 일부 구간을 탐방하며 그 속살을 엿보고 다양한 예술행위로 가슴 벅차게 할 것이다. 공간의 가치를 춤과 노래와 퍼포먼스와 미디어아트 등으로 표현해 삶의 향기, 여백의 미가 가득한 여행지가 될 것이다.

 청주향교에서는 리마인드 웨딩이 열리고 도청에서는 건물 안과 밖을 둘러보며 근대 충북행정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문화유산 투어를 하면서 인증 사진이나 스탬프를 찍으면 기념품도 쏟아진다. 밤길을 걸으며 우리 지역의 역사현장을 가슴 뜨겁게 체험하고 예술의 향연을 함께하며 아름다운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

 걸어서 두 시간. 달빛은 청아하고 별은 쏟아질 것이며 바람은 숲과 골목길에서 머물다 심술궂은 벗으로 다가올 것이다. 과거로의 여행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오래된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는 것을, 삶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라는 것을 느낌이 있는 한여름 밤의 달콤한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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