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 수필가

[김영애 수필가] 늦은 퇴근길 달이 나를 따라온다. 집으로 가는 허허한 퇴근길에 달이 내 가슴으로 파고들어온다. 신호등에 잠시 멈춰 서서 차창 밖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니 칠월 보름 둥근달이 차오른다. 스산한 가을 저녁 도심의 불빛이 아무리 휘황해도 교교하게 세상을 비추이는 가을밤 보름달만할까! 나만 바라보고 나하고만 눈을 맞추고 있는 듯한 저 달과 동행하며 집으로 가고 있다.

 꽃피고 지는 봄보다 나는 가을이 언제나 설렌다. 봄바람이 나는 여자가 아니라 나는 가을바람이 잘 드는 여자다.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시간 속에서 내안에 여성성이 상실되어 간 걸까! 가을이 되면 가슴이 터질듯이 기쁘고 슬픈 날의 감정기복이 널을 뛴다. 나의 가을바람은 그렇게 시작이 된다. 내 생애 주기의 환절기 예순 살의 가을이다.

 화단에 가을꽃들이 피어있다. 지난봄과 여름 저 화단에 어떤 꽃들이 피고 졌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향기가 요란했던 꽃들은 봄날의 추억처럼 한여름 밤의 꿈처럼 그렇게 잠시 머무르다 사라지고 지금은 꽃대가 실한 가을꽃들이 가을바람에 꽃물을 들이고 있다. 향기가 없는 가을꽃은 누굴 애써 유혹하려하지도 않는다. 화려하게 치장을 하지 않고 수수하게 피어있는 가을꽃은 그래도 누군가의 꽃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목을 길게 빼고는 그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친구의 회갑생일에 초대를 받았다.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운그녀, 가을꽃 같은 친구의 미소가 오늘은 눈이 부시다. 그녀만의 향기가 오늘따라 그윽하다. 아들과 딸들이 자리를 주선하여 회갑생일 파티를 했다고 자랑을 했다.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가족사진을 배경으로 풍선장식 현수막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생은 60부터라고 전해라!"라는 글귀를 보면서 한바탕 웃으면서도 친구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회갑이란 돌고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온 생일이다. 겪을 수 있는 해를 다 겪어본 것을 격려하고 축하하며 또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기념해주는 자리이다.

 오래된 사진첩 속에 할머니 회갑잔치 사진이 떠오른다. 서너 살 즈음으로 보이는 나는 엄마의 품에 안겨서 웃고 있었다. 그 흑백사진의 배경은 집안 마당이었다. 십장생 병풍 앞에 길고 너른 교자상에는 온갖 다과와 떡과 음식들이 켜켜이 높게 고여져 있었다. 그동안 할머니가 베풀고 쌓아 오신 음덕만큼이나 높게 잔칫상 음식을 고여야 도리이며 효도의 척도라고 여겨졌었다. 몇날 며칠을 준비했을 그 회갑 잔칫상 앞에 하얀 머리를 곱게 빗어 쪽을 올리신 할머니가 비단 한복으로 단장을 하시고 앉으셨다. 자손들은 절을 올리면서 회갑까지 살아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만수무강을 빌었다.

 오늘 친구의 회갑 생일 자축 자리에서 예순의 우리들은 나이를 잊고 깔깔대며 시간을 보냈다. 인생은 60부터라고 하면서 건배를 했다. 지나온 세월의 어느 모퉁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픈 기억이 누군들 없을까! 웃으면서 그 웃는 얼굴로 눈물도 함께 찔끔거렸던 오늘 예순의 친구들과 시간은 행복했다. 나와 동행해온 보름달이 집에까지 따라와 아파트 베란다 창문에 걸터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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