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오늘날 우리나라가 혐오의 감정으로 넘치고 있다. 정치적 성향이나 성별의 차이 때문에, 심지어는 자신이 좋아하는 제품 때문에 상대 회사나 제품을 이유 없이 비난하기도 한다. 청년들은 지금 우리나라의 여러 좋지 않은 상황을 빗대어 '헬조선'이라 부르며 조롱한다. 혐오의 감정은 대부분 서로 다른 두 집단 사이에서 충돌을 통해 일어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는 본인 스스로도 혐오의 감정이 있는지도 모른 채 상대방을 혐오하기도 한다.

 성경에도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는데, 하루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한 여인을 잡아다가 예수 앞에 세웠다. 그리고는 이 여인이 간음하던 현장에서 잡혔는데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 명하고 있는데 이 여인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인지 예수를 향해 의견을 달라고 묻는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말을 들은 군중들은 모두 이 여인을 돌로 치기 위해 준비했다. 그들은 설마 예수가 돌로 치는 형벌 이외에 다른 말을 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세의 율법은 결코 어겨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땅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예수가 무슨 내용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목적만은 분명하다. 그곳에 모인 군중들의 마음에 찔림을 주기 위함이었다. 글을 다 쓴 예수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예수의 글과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군중들이 찔림을 받은 이유는 예수의 글과 말을 통해서 자신들의 마음에 있던 감정이 '정의'가 아니라 '혐오'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죄인을 징벌하는 것은 곧 정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자신들이 간음한 여인을 바라보는 눈은 정의가 아니라 혐오였던 것이다.

 정의와 혐오는 무엇이 다른가? 정의로운 마음으로 죄인을 징벌하는 것은 미래를 바라보는 눈이다. 죄인을 향한 징벌이 죄인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지를 고려한다. 그래서 이 징벌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마음이 바로 죄를 향한 정의의 마음인 것이다.

 하지만 혐오는 다르다. 혐오는 그저 상대를 미워하고 분노하기만 하면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죄를 향한 분노처럼 보이지만, 사실 혐오의 대상은 어느 누구이던 상관없다. 그저 혐오의 감정에 대해 정당한 이유를 얻기 위해 죄인이 필요할 뿐이다. 그래서 혐오는 늘 과거만을 바라보는 눈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이 혐오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면 충분하다. 지금 내가 미워하는 저 사람도 인격을 가진 하나의 사람이며, 그 주변에는 나와 같이 가족, 이웃, 친구 등 많은 인간관계로 엮여있는 인생임을 알게 된다면 상대를 향한 혐오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결국 해답은 바로 사람이다. 우리의 시선, 우리의 목적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사람을 향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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