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육정숙 수필가] 호수 속으로 하늘이 첨벙 뛰어들었다. 그 속에서 구름이 떠간다. 바람도 지나간다. 바람에 나부끼는 작은 나뭇잎들의 섬세한 움직임에도 호수는 여울을 만든다. 작게, 크게 더 큰 원을 그리며 조용히 모두를 품는다. 가을은 또 하나의 사랑이다. 하늘인지 호수인지 하늘을 쳐다봐도 호수를 내려다 봐도 호수 면을 중심으로 완전한 데칼코마니다. 가을빛의 긴 행렬이 호수의 심장을 가로질러 깊숙이 파고든다. 무심히 지나가던 바람이 일러준다. 삶은 꿈꾸듯이 사는 거라고.

 구름에 희망을 얹고, 대학노트에 꿈을 적고, 바닷가 모래밭에 내 이름을 적고, 눈밭에 나를 복사하고, 그렇게 바람에 흔들려 나부대던 시간들이 일렁이는 물결에 흐트러진다.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라는 옛 시인의 시구가 나를 보듬는다. 봄엔 가뭄으로, 여름엔 비바람으로 흔들어대던 시간들을 어머닌 계산도 않고 품었다. 시건방진 봄바람이 궁둥이를 흔들며 아름아름 맺어놓은 열매들을 애 잦으며 바라보던 어머니!

 밤새 별똥별을 수없이 쏟아냈다. 어머니의 세월을 닮지 않을 거라고, 앙팡지게 쏟아 내던 풋내기의 수다가 아직도 귓전에 쟁쟁한데. 어머니는 여전히 세월 깊숙한 곳에 쪼그리고 앉아 투박한 손으로 멍석위에 빨간 고추만 널었다. 아직도 어린, 자식들에게 옹기종기 담아 보내야 할 고추장 항아리들의 개수를 헤아리면서. 오래된 괘종시계의 고집스럽게 규칙적인 소리에 12장짜리 달력이, 낡은 벽에서 수없이 매달렸다 수없이 사라지는 동안 어머니와 나는 변한 것이 없다.

 울컥! 목이 멘다. 덜 여문 것들을 더 여물게 하는 빛과 속도 없이 내주는 품! 그리고 어설프게 여물어가는 세월 때문에. 그래도, 암만 그래도 어머니의 투박한 손마디에 머문 고추가 더욱 빨갛게 보일, 이 계절은 어머니! 당신을 더욱 생각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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