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태 건양대 교수

[박기태 건양대 교수] 영원할 것처럼 뜨겁게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대던 여름은 한바탕 소란과 아우성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지난여름의 뜨거웠던 열정을 식히고 내면의 거울에 나 자신을 드러내며 계절의 길모퉁이 어디에선가 서성이다가 조용히 나에게로 돌아가는 가을날에는 홀연 듯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 누구에게도 떠난다는 말할 필요도 없이 그리고 설령 단 하루만의 위안이 되는 여행이 될지라도 이따금씩 마음속에 품어 왔던 무작정의 문학기행을 떠나고 싶다.

 대학시절 문단에 처음 입문해서 철없이 뭣 모르고 아무 글이나 써대던 때 사랑이란 묘한 감정을 불어오도록 나를 자극했던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미당 선생님의 고향인 고창으로 달려가 시속에 담겨진 감정을 음미하고 싶지만 핑계 같지 않은 이유로 그러지 못함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시 안에서 미당 선생님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 누구를 그렇게 그리워했을까? 눈이 부실 정도로 맑게 갠 푸르른 날에는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까닭에 아마도 우리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 문득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푸르른 날의 추상은 우리의 그리움을 한층 더 심오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만약에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었다면 그 사랑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더 사무칠 것이다.

 이름 모를 어느 철학자는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움의 끝에 결국 남는 것은 사랑이다.'라는 말을 했다. 예전에는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는데 지금에서야 그의 말이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잠시 여유를 가지고 바쁘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자. 사람들은 저마다 할 일이 있고 생각할 것들도 많아서 서로에게 무관심한 듯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 안에는 사랑이 있고 눈물도 있으며 고통까지 담아두고 있다. 그래서 맑은 날이면 자신을 되돌아보고 공연히 슬퍼지는 가슴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밝음 속에서는 어두운 면을 더 생각하게 되는 심리현상이 생겨서 외롭다거나 슬픔의 감정이 더한다고 느껴진다.

 생각해 보건데 우리들은 살아 있을 때만이 오로지 의미 있고 아름답다. 푸르름에 지쳐서 단풍의 빛깔로 물드는 가을날 하늘은 새파란 연못의 물결처럼 깊고 넓게 빛난다. 보슬비 내리는 소슬한 언저리에서 우리들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아마도 이것은 삶에 대한 하나의 징표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고로 살아있음의 징표로 우리는 꿈을 꾸며 살아야한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 속에 누군가를 충분히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며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다보면 우리의 가슴은 따뜻함으로 물들 것이며 그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희망으로 더욱더 성숙해 질 것이라는 믿음이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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