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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굴곡 함께한 진천 근대교육의 효시애국지사 이상직 선생, 1905년 개교
남기윤  |  news@ccdail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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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03.19  19: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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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교육 100년 ⑩ 진천 상산초등학교

▨ 근대교육의 씨앗 뿌린 이상직 선생

▲ 설립자 이상직 선생
1984년 갑오경장과 을미사변을 계기로 정부는 서정을 개혁하는 동시에 교육의 진흥에 주력해 학교 교육에 대한 여러 법정을 제정·발표하고 각종 학교를 설립해 개화, 자주 독립과 경제 발전을 위한 교육을 실시했다.
특히 1892년 2월 고종의 '교육입국조서'에 영향을 받은 경향 각지의 애국애족에 불타는 선각자들이 사재로 학교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힘쓰게 됐는데 이무렵 신학문을 교육하는 학교가 충북 진천에도 설립됐다.
이상직 선생은 구한말 복잡한 국내 정세와 외부 열강의 패권쟁탈로 인해 우리 민족이 시련을 겪고 있던 1878년 진천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서울의 큰아버지 댁에서 독립운동가인 이상설 선생과 숙식과 수학을 같이하면서 진충보국의 기틀을 다졌다. 이상설 선생은 이상직 선생의 종형으로 8살 위였는데 당시 세계 대세와 국내 정세에 밝았으며 신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상직 선생은 이상설 선생의 집에서 수학하는 동안 그곳에 출입하는 이상훈, 이시영, 이회영, 정인보, 이범세 등과 사귀는 동안 국내·외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기울어져가는 국권을 바로 잡아 보고자 노심초사 했다.
1905년(광무 9년) 을사조약이 체결돼 외교권이 일본에게 박탈되자 이상직 선생은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구미 선진 국가의 교육방법을 도입해 문명인을 양성하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해 10월 28일 고향인 진천으로 내려와 사립 '상산학교'를 창설했다.
당시 읍내리 소재 381번지 자택 객실을 개조해 교실을 만들고 사재를 들여 교육 시설을 마련한 다음, 학생을 모집하고 교사를 초빙해 신학문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진천에 처음으로 교육의 씨앗을 뿌렸다.
▨ 사립 보통상산 학교의 교육
사립 보통상산학교는 진천에 세워진 근대 학교의 효시로써 개교 당시 생도로는 이철해, 주익환 등 4명이었으며, 교육내용으로는 종전에 서당에서 가르치던 학문 외에 국어, 산수, 지리, 역사, 법학, 체조, 가창 등을 가르쳤다.
이상직 교장과 남진우씨(당시 교사로 추정)가 교육해 학생 수가 점차 증가했으며 교실이 협소애 향교의 명륜당으로 전전하면서 재정난을 겪기도 했으며 학교 명칭도 '널리 학생을 모집해 신학문을 가르치다'라는 뜻이 담긴 '광명학교' 또는 '문명학교'라 부른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1909년(융희2년)에는 당시 이택응 진천군수로부터 향교재산 연 수입 조 40여 석과 옛날 현아의 터를 학교부지로 제공받아 교사를 신축하고 자신이 교장이 돼 교육에 열정을 쏟았으며, 그후 1911년 일본에 병탄되던 해에는 생도 수가 8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 공립학교로 출발
1868년 진천군 이월면 중산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호신 선생은 자수성가해 토지 천여석지기의 부농을 이뤘다. 선생은 이 재산으로 많은 사회사업을 했는데 특히 육영사업에 헌신적으로 공헌한 독지가이다.

▲ 이호신선생
1940년 진천상산초등학교는 현재의 삼수초등학교터에서 28년을 경과해 오는 동안 교사가 노후해 무너질 위기에 이르렀고 학생 수는 갑자기 늘어 도저히 수용할 수 없게 되면서 교사 증축이 시급한 형편이었으나 부지가 좁고 재정 형편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당시 읍내리에 거주하던 이호신 선생은 이러한 사정을 알고 사유재산 토지 500석지기(당시 가격 5만7000원)를 희사해 지금의 위치에 부지 7000여 평을 마련하고 그 위에 철근 콘크리트로 교사 2동(교실 14개)과 부속건물(숙직실, 화장실, 창고)을 지어 1940년 11월 25일 이사하도록 해 새로운 배움의 전당을 마련하게 됐다.
▨ 당시 언론이 본 사립 보통상산학교
1909년 9월 21일 발행된 황성신문 잡보 '문교장진'에는 "충북 진천군 사립 문명학교는 재정이 어려워 폐교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군수 박초양씨와 군 주사 김옥현씨가 열심히 도와 학교를 존속시키는 방침을 정하고 이번 달 14일에 2학기 개학실을 했는데, 서울 사는 신사 박승봉, 이관식 씨가 먼길을 마다 않고 함께 학교를 찾아와 찬성하는 뜻을 더욱 크게 나타내 성황을 이루었다고 하더라"고 보도했다.
또한 1909년 6월 24일 자 대한매일신보 잡보 '운동성황'에는 "진천읍 문명학교 교감 이상직씨와 영국인 선교사 김우일씨가 계획하여 이번 달 12일에 군내 5개 학교와 목천, 병천학교에서 연합대운동회를 베풀어 행하였는데 학생이 수백 명이요, 구경꾼이 많이 모여서 성황을 이루었다 하더라"고 쓰여있다.
▨ 민족의 격동기 함께 걸어온 상산초등학교
대한제국 말 일본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진천에 신학문을 가르치는 근대 학교의 효시로 출발한 진천상산초등학교는 민족의 격동기를 함께 겪으며 걸어왔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의 황국식민정책으로 인해 한민족의 민족문화 말살정치 및 철저한 식민지 통치시대를 겪어야 했으며 해방 후에는 3년간의 미 군정과 6·25 전쟁 중에도 교육활동은 꾸준히 이어져 왔으며 지금까지도 진천의 초등교육기관의 견인차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진천=남기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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