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육정숙 수필가] 가을이다! 피부로 스치는 바람결이 산산해서 좋다. 태양도 여름처럼 이글거리지 않는다. 들녘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잘 익어가고 있는 열매들을 보듬으며 깔깔대는 가을은, 달콤하고 향기롭다. 가을빛이 우려 낸 산과들은 소리 없이 예서제서 고운 빛으로 시간을 정리 하고 있다. 봄, 여름을 지나 한 생애의 마지막 혼신을 다하는 계절! 또 다른 시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뒤를 돌아보게 하는 이 계절은 봄부터 아름아름 충실했던 시간들을 다양한 빛으로 쏟아내고 있다.

 횡단보도엔 신호등이 빨간 눈으로 귀여운 꼬마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네댓 명되는 유치원생들의 조잘거림이 잠깐의 시간과 공간을 메우는 동안 누군가 횡단보도를 휙 지나간다. 조잘거리던 아이 하나가 '안 돼요 빨간 신호인데…, 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 가네?' 잠시 뒤 한아이가 외쳤다 '그러면 우리도 건너자' 또 다른 아이가 '안 돼 빨간 불이야' 아이들은 아저씨가 피다 만 담배꽁초를 휙 버리며 지나 간, 횡단보도와 빨간불의 신호등과 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본다. 아저씨의 부끄러운 뒷모습은 이내 골목으로 사라졌다.

 산과들은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다. 키 작은 들풀들도 볼품이야 있든 없든 까만 씨알 하나 남겨두고 시간 속으로 사위어 가고 있다. 그 공간과 시간들을 또 다른 시간들로 채워져야 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묵시적으로 지켜가야 할 질서들이 있다. 빨간 신호등에선 멈추고 초록 신호등에서는 건너가야 한다고,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횡단보도에 서있는 맑고 고운 아이들의 눈빛 속으로 혼선을 빚어주는 어른의 뒷모습은 고운풍경에 먹칠을 했다. 무엇이든 그대로 흡수되는 스펀지 같은, 아직 여물지 않은 아이들에게 작든 크든 의식 있는 어른들의 뒷모습이 채색되는 이 가을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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