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자 수필가

[한옥자 수필가] 건들바람에 취해 방심한 사이에 가을은 저만치 가고 있다. 가을은 은근히 왔다가 이내 가 버리는 계절이며 더위와 수해를, 한파와 눈사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기 알맞은 계절이다. 그렇다고 일상에 더 충실했던 것은 아니다. 덥거나 춥지 않으니 긴장이 풀리고 사는 일은 더욱 심드렁했다.

휴일 오후에 집 근처 거리를 배회하며 애써 가을의 끝자락을 찾아다녔다. 바람이 많이 불어 매달린 나뭇잎보다 떨어진 잎이 더 많았다. 낙엽은 밟을 때마다 바스락 소리로 응답했다.

마침 휴일이라 거리에는 차량이 적었다.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지 못하도록 쌓인 낙엽 덕분에 자유롭게 걷고 있는데 소스라치게 놀랄만한 경적음이 울렸다. 나도 모르게 차도를 침범한 것이다. 잘못은 했지만 멀어지는 차를 향해 주먹질이라도 할 판인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낙엽 때문인데 좀 봐주지!’ 그리고 혼자 히죽 웃었다. 질러대는 소리에 혼쭐이 난 후, 무심천으로 갔다. 여러 날 만에 다시 와 보니 억새꽃은 만개했고 갈대꽃은 흐드러졌다.

흔히 억새와 갈대는 구분이 어렵다고 한다. 꽃 피는 시기가 같고 둘 다 볏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며 바람이 불면 흩날리는 자태가 비슷해 그렇게 말하지만 둘은 분명히 다르다.

색이 다르고 모양이 다르며 크기가 다르다. 억새는 산이나 들에 피고 갈대는 습지에 핀다고 하지만 물억새는 물 근처에서 자라니 어디서 사는 것만으로는 구분이 어렵다. 그런데 둘의 분명한 차이를 재발견했다. 억새의 잎은 붉게, 갈대는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꽃만 비교하며 잎은 외면한 탓에 잎의 다름을 이제야 본다.

억새와 갈대는 꽃을 보는 식물이 아니다. 바람에 나부끼는 자태를 보는 풀이며, 황량한 벌판을 유일하게 지키는 풀이며, 바람이 세차게 불수록 더욱 강해지는 풀이다. 한낱 풀의 구분도 모호한데 사람의 깊은 속심을 어떻게 알아낼까? 연일 구속이다, 조사라고 해봐야 액면 그대로 사실이 드러나기는 할까?

지그시 알려도 충분한데 대놓고 책망하던 경적 음뿐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는 속담 때문인가? 아니면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떼법 쓰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탓인가? 억울함과 분함을 참고 살아온 국민은 숨죽이고 조용히 이겨내고 있는데 위법을 일삼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오히려 크다.

방귀 뀐 놈이 성질을 낸다더니 딱 그 지경이다. 마지막 발악인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을 영원히 가지려고 했던 그들. 뒤가 구려 미리 목청을 높이는 것인가. 과거는 모두 덮는 것이 상책이란다. 그래서 우기는 말이 정치보복이란 말인가.

욕설이 욕설을 낳고 악이 악을 낳는다. 나날이 어마무시해지는 사람의 말이 아닌 손가락의 말들이 마음을 무겁게 하는 세상, 정중히 사양한다.

국민은 합법적이며 명분에 맞는 일에만 관심이 많다. 나머지는 벌판에 부는 바람소리 같은 허망한 외침일 뿐. 억새와 갈대는 온유한 백성 같은 풀, 뿌리가 아주 강한 풀임을 잊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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