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 수필가

[김영애 수필가] 퇴색한 나뭇잎 몇 장이 벌거벗은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미처 가을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떠나는 가을의 뒷모습은 누추하기 그지없다. 바람이 한번 불때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그저 바람이 가는대로만 영혼 없이 온몸을 내 맡기고 가을이 가고 있다. 어제저녁 퇴근길에도 샛노랗던 은행나무 가로수가 오늘 아침 출근길에 보니 간밤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었던가! 밤새 노란 오물을 수북하게 토해놓았다. 과음이라도 한 걸까, 똥물까지도 다 토한 듯 후줄근한 모습으로 서있는 은행나무도 가을을 심하게 앓았나보다.

 무심천의 가을은 봄보다 아름답다. 갈대가 마음을 풀어 놓은 물결위로 꽃보다 아름다운 단풍이 노을처럼 붉게 물을 들인다. 어디서부터 이 인연은 시작이 된 것일까! 질긴 인연의 끈이 흐르고 흐르는 무심천 굽이굽이 잠시 여울이 되어 한숨을 돌린다. 그럴 때마다 생각해 보지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함께 흘러온 시간이 억겁일 것이다. 매순간 너무 멀리에 와있다는 생각에 머문다. 내내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하고 다시 손잡은 채 자분자분 흐르는 무심천에 꽃보다 아름다운 선홍빛 사연 가을 편지되어 물위로 떠간다.

 수시로 마음을 헹굴 수 있는 무심천을 끼고 살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갈대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술렁댄다. 건성건성 정리 되지 않는 생각들이 돌다리를 건너고 물길을 따라서 걷다보면 흐르는 물처럼 유연해 지기도 한다. 작은 자갈돌에 부딪치며 흐르는 물결이 크게 신음소리를 내는 것은 내공이 깊지 않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이작은 바람에도 물결을 만들고 온몸을 뒤틀면서 흘러가는 걸까! 그래 작은 상처에도 아파하고 소리치며 엄살 피우는 천진함도 다정해서좋다. 다 들여다보이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한 친구의 의연함도 든든하게 느껴져서 참 좋은 가을이다.

 그 누구와 약속도 하지 않은 채 첫눈을 기다리는 중이다. 첫눈이 오는 날은 왠지 누군가를 만나고 싶고 만나야 될 것 같은 이 마음은 아주 오래된 전설처럼 자리 잡고 있다. 올해에는 첫눈을 맞으며 달려 나가서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겨울이다. 첫눈은 어김없이 내릴 것이고 나의 소망은 눈 녹듯이 또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첫눈의 전설을 꿈꾸면서 보내온 세월 속에 내 머리위에는 만년설 같은 잔설이 하얗게 내려 앉아있다.

 겨울 채비로 마음이 분주해진다. 몸도 마음도 동동거리며 보내는 시간이 많다. 한해를 보내면서 마무리해야 할 일들과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같이 쌓여있다. 도움을 주고받으며 지냈던 고마웠던 지인들에게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진 못하더라도 따듯한 식사라도 대접하고 차도 마셔야한다. 12월은 회한과 감사가 넘치는 달이다. 열심히 달려왔지만 미진했던 나에게도 위로와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지금 창밖에 첫눈이 펑펑 내린다. 겨울의 서막이다. 첫눈 같은 축복이 모든 이들에게 가득하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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