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연덕 칼럼니스트

[장연덕 칼럼니스트] 종교기관에 잠시 머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을 안내하던 사람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지요. 친밀하다거나 서로 통성명을 한 사이도 아닌 상황에서, "방 넓다, 나도 옆에서 자도 되겠다."이 말을 두 번을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성희롱이에요."라고 지적하자, 그 순간 사과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성희롱 피해자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과정을 밟으며, 어디서 이 문제가 생겼는지 파악하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일단 저는, 그 사람보다 사회적 강자입니다. 신체적으로 또 학력면에서, 우월한 지위에 있었고, 굳이 금전적 상태를 따지자면 제가 강자이지요.

 성적 수치심을 느낀다기보다는, 불쾌감, 혹은 역겨움을 느끼는 상태였고, 불안함이라든가 공포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습니다. 가장 이상한 것은, 현장에서 지적받고도 사과하지 않더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다행인 점은, "미안한 일이다, '사과를 받으러 온다면' 사과 그거 못하겠냐."라는 입장을 책임자에게 전달한 점입니다. 보통 여기까지 오기도 힘든 상황을 우리가 여러 성희롱 사건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성희롱은, 당사자가 불쾌감을 느꼈고 그걸 공소시효 안에 지적하며 공소를 제기할 때 성희롱으로 다뤄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늘 하는 실수가, 그걸 왜 이제야 이야기하느냐, 당사자끼리 해결하라면서, 집단의 안정성을 해친다는 명분으로 피해를 받은 당사자를 더 위협하고 불편하게 만들며, 수치심의 원인을 전가하는 데에 있지 않았나 합니다.

 보통은, 이런 지적과 사과하라 설득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극도의 분노와 수치심을 못 이기고 자살시도들을 합니다. 제가 사회적 약자였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수긍하는 바입니다. 제가 이 문제를 지적했을 때도 꽤 이상한 상황을 접합니다. 관리책임자가, "니가 여태껏 나에게 보낸 문자는 성희롱이 아니냐. 그런 친밀한 문자를 보내다니. 내가 이거 다 우리 기관 아주머니들에게 돌려보면 넌 무사할 줄 아느냐"라는 말과 더불어 "니 옷차림도 문제가 있었다, 한  두사람 지적한 게 아니다, 너 나 좋다고도 얘기했다"라는 답을 해온 경험을 합니다. 아주 전형적인, 성희롱 사건의 2차 가해이지요. 신문에서나 보던 내용이지요.

 제가 이 상황을 물끄러미 보면서 '이래서, 이 문제가 우리사회에서 근절이 안 되는구나.'하고 깨닫습니다. 장대비가 쏟아져서, 가기 전에 긴바지에서 반바지로 갈아입고도 스카프로 다리를 가리려고 가져간 저의 다리만 본 것입니다. 핵심은, '정작 가해자는' 뉘우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인은, 실수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겠지만, 주변의 반응이 심하게 폭력적입니다. 이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저는 다시 관찰을 하고 안타까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2차 가해를 저지른 사람을 키워낸 가난. 가난하여 부모가 실수를 정면 인정하는 자존감을 주지 못하였고. 여성에게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를 못 가르쳤구나. 우리는 성폭력이 아니라 가난한 부모세대의 불행과 싸우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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