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찬바람이 가슴 파고드는 날이면 / 군불지핀 따끈한 아랫목이 그립다 / 화풍이월 들녘 지나 길 한쪽에 / 동무하고 서있는 자그마한 비석 둘 / 김인환, 이택하 구휼 시혜비(救恤施惠碑)이다. //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데 / 보릿고개, 그 섧고 험한 곤궁 앞에 / 곡식 풀어 손잡아 준 이가 있었으니 / 이웃들이 그 은혜,  빗돌에 새겨 / 널리 알리고 오래 기억하려 함이다. // 5형제 아들의 이름에 담긴 의미 /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 천석꾼 아비의 염원이 바로, / 사람의 도리, 이 다섯이었구나 /황금 들녘 오상(五常)이 잔잔한 감동이다 //

 무제봉 아래 충효를 자랑하는 마을이 있다. '노은실'이다. 마을 앞 들녘을 지나면 길가에 자그마한 비석 둘이 쌍을 이루고 서있다. 구휼시혜비(救恤施惠碑)이다. 구휼이란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빈민에게 국가, 사회적 차원에서 금품을 주어 구제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의 사회복지와 맥을 같이 한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일이다.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소작인들이 먹고 살기가 몹시 어려웠을 때 소작료를 면제해 준 사람이 있었다. 천석꾼의 아들 김인환과 이웃동네 이택하이다. 그 덕분에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고, 후에 사람들은 그 둘의 은혜를 빗돌에 새겨 기린 것이다. 큰 뜻에 비해 눈길 주는 이 없이 쓸쓸하고 소박하다. 어쩌면 낯 내지 않고 진정 구휼 했던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게 더 마음 편하다.

 인환(仁煥)은 그 아래로 의환(義煥), 예환(禮煥), 지환(智煥), 신환(信煥) 형제를 두고 있다. 천석꾼 아버지의 염원은 천석, 만석 재산을 늘리는 것보다 아들 5형제에게 仁, 義, 禮, 智, 信, 이 다섯 가지, 사람이 갖추어야할 도리를 물려주고 싶었나 보다. '구휼'이라는 말에선 왠지 청솔가지 군불 냄새가 난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아랫목은 따끈해 오지 않았던가.

 '구휼시혜비'는 오늘날 젊은이들에겐 보도, 듣도 못한 낯선 말이요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자그마한 빗돌에는 배고픈 시절 서로 나누려는 정과 이를 진정 고마워할 줄 아는 품성이 전설처럼 스며있다. 밥상머리 아버지의 훈계처럼 귓전에 맴돌다 말지라도 그저 묵묵히 들녘에 서서 사람 사는 도리를 깨우쳐 주고 있다.

 따뜻함이 그리운 계절이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이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파르르해 보인다. 나눔의 정이 더욱 절실해지는 때다. 비록 곤궁했던 시절보다 정겨움은 덜 할지라도 이 시대, 이 사회를 지탱해 주는 힘이 서로 나눔이요. 잔잔하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강한 힘이 바로 사랑의 피라미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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