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태 건양대 교수

 

[박기태 건양대 교수] 창문을 여니 제법 쌀쌀한 바람이 온 몸을 감싼다. 겨울인가 보다. 세월의 흐름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계절의 변화이듯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매무새가 두툼함으로 바뀌고 가을의 풍요로움을 간직한 채 겨울의 안식을 누리려 분주하게 유난을 떠는 모습을 보니 분명히 겨울은 왔나 보다. 나 역시 그들과 어우러져 살아야하는 사람이기에 그들에게 편승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 계절을 맞이하면서 지난날들의 내 자신을 채근도 해보고 더 나은 날들의 기대감 속에 시인 루이스(C.D.Lewis)가 「당신을 위한 시 모음 (Poetry for you)」에서 읊조렸듯이 겨울이라는 시간 속에서 기다림의 고통과 여유에 흠뻑 젖고 싶다.

 겨울을 무척 사랑하는 나는 겨울의 본질이란 봄날의 아지랑이 속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내음을 향유하기 위한 단련의 시간이며 기다림의 순간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혹독한 단절의 계절, 겨울 속에서도 언제나 유연한 우리의 숨결은 흐르고 있으며, 겨울이 드세어지는 절정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도 그건 분명 더욱 가까이에서 우리에게 손짓하는 격렬한 부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 모든 생각과 행동은 기다림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사람마다 모습이나 생각이 다른 것처럼 기다림의 형태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 서부 민요 '클레멘타인'에서 늙은 아비가 딸을 애타게 그리는 기다림도 있고, 적막한 고도 엘바 섬에서 재기의 기회를 기다리던 영웅 나폴레옹의 기다림도 있으며, 「고금창기」에 나오는 이사달아사녀 설화 속의 아사녀는 영지에 몸을 던짐으로써 무영탑의 전설을 만들어 기다림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처는 일본에 잡혀가서 돌아오지 않는 지아비를 향해 동해를 바라보며 기다림의 화석이 되기도 했다.

 우리의 삶, 그것은 어쩌면 기다림의 여정은 아닐는지…….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산다. 건강을 잃은 사람은 건강이 되찾아 오기를 기다리며 고난에 몰린 사람은 희망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잉태되지 않고 태어나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듯이, 모든 피조물들은 잔인하고 혹독하다고 생각되는 겨울의 차가움 속에서 기다리고 아주 조금씩 꿈틀거리며 존재한다. 그리고 겨울 속에서 단련된 기다림만이 사계절을 견뎌낼 수 있는 굳은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들 모두의 희망이며 다가올 날들의 따스함과 활기참을 만끽할 고갱이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심연을 알 수 없는 열정 속에 몸을 던지고픈 여름이라는 계절이 있고, 불타는 단풍 속에서도 더욱 진하게 절망과 좌절을 맛볼 수 있는 가을도 있다. 그러나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활기차게 흐르던 강물도 영원히 녹지 않을 것처럼 얼려놓는 두터운 얼음덩이의 무서움과 두려움을 경험할 지라도 겨울의 기다림에 조용히 귀 기울여 보자. 그러면 그 기다림 속에서 도도하고 아련하게 피어나는 우리의 바람이 꿈틀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기에 이 겨울 기다림에 한번 흠뻑 젖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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