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육정숙 수필가] 일찍 퇴근해서 가족을 기다리며 저녁 밥상을 차린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잘 익은 배추김치도 꺼내서 썰어 놓았다. 된장찌개엔 두부도 들어가고 호박도 들어가고 매운 파도 들어가고 흙으로 빚어낸 독 안에서 오래도록 삭히고 삭혀 성숙된 된장도 들어간다. 두루두루 섞여 뜨거운 열에 끓여지는 된장찌개의 맛은 구수하면서 맛깔스럽다.

 문득 어느 신부님의 강론이 기억난다. 배추김치는 밭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배추통이 반으로 잘릴 때 죽고, 소금에 절여 질 때 죽고, 매운 고추와 젓갈에 버무려질 때 죽고, 김치냉장고에 들어가면서 오랜 시간 동안 죽는다, 이렇게 다섯 번을 죽어야 제대로 숙성된 김치 맛을 낸다고. 배추김치처럼 죽고 또 죽어야 제대로 숙성 된 맛을 내는 것처럼 우리인생도 다른 사람들과 맛있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숙성되는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강론이었다.

 어느새 12월이다. 이유 없이 마음이 산란해진다. 12장의 달력 중 마지막 한 장에 남아있는 서른 하루의 날들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날들을 챙겨본다. 창문을 열어본다. 저녁 찬 바람이 휙 들어온다. 창가 밖으로 바람도 지나고 사람들도 종종걸음으로 지나가고 멀리 보이는 도로엔 차들도 정신없이 지나간다. 오늘 하루의 시간도 어둑어둑하게 세월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모두 다 지나간다.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모두가 향하는 발걸음들의 끝이 어디가 될지! 또 한해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다.

 내 아집과 '욱' 함으로 채워 진 시간들이 찬바람으로 불어온다. 나이 듦에 따라 채워가야 할 시간들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배려하는 제대로 성숙된 맛과 품의 향기로 은은해지는 공간이길 기대해본다. 가족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시간,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가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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