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혜 한국교원대 교수

[백성혜 한국교원대 교수] 회의 후 서로의 기억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분명히 말했는데 직원은 엉뚱한 걸 기억한다."고 하소연하는 리더들이 있다. 이런 상황은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사이에도 흔히 일어난다. 누구의 기억이 더 사실에 가까울까? 답은 직원이나 자식, 혹은 학생일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기억이 쉽게 편집되고 왜곡된다. 그리고 다양한 사건에 간섭받는다. 어떤 사건은 과거의 기억을 불쑥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런 기억은 사실이 아니다. 세월과 함께 뇌 속에 저장된 기억들은 나중에 일어난 경험에 의해 조금씩 변형되기 때문이다. 자식 이름과 손주 이름이 혼동되는 경우처럼 말이다.

 기억의 편집 정도는 기억의 함축량하고도 관련이 있다. 그래서 회의 중에 실제 대화보다 더 많은 사고를 동시에 하기 때문에 리더는 대화에 등장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리더가 기억에 의존하여 어떤 주장을 하게 되면 부하 직원들이 당황하게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반면 직원은 기억에 의해 간섭을 받는 행동을 더 많이 한다. 회의 중 대화를 과거 사건에 비추어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리더의 말이 의도와 다르게 직원을 정서적으로 과잉 반응하게 만드는 일이 생긴다. 엄마가 말을 시작하면 아들이 잔소리로 여기고 나가 버리는 일과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이런 기억의 오류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이 있다. 만약 인간이 컴퓨터와 같이 사실만을 기록하는 능력을 가졌다면 인류는 이렇게 발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기억의 왜곡은 창의적인 사고의 출발이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고흐는 신경쇠약 상태에서 정신적 고통을 받으면서 뛰어난 예술 작품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가 바라본 세상은 우리가 바라보는 평범한 세상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치르는 대부분의 시험은 편집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많은 학생들이 수능 시험을 치르기 전에 "내 머리가 컴퓨터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번 보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게"라고 생각한다. 기억력이 좋은 학생이 학교 성적과 수능 성적이 좋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절대로 인류의 문명 발달에 기여를 하지 못한다. 실제로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들은 대부분 자폐증상을 겪으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세상을 살기 힘들다. 신경심리학자 루리야가 보고했던 환자 셰르셰브키는 엄청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직업은 여행기억술사였다고 한다.

 사실만 기억하는 것은 이제 컴퓨터에게 맡겨도 된다. 인간은 이보다 더 중요한 이해를 목적으로 한 기억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억의 편집과 재구성, 그리고 심지어 왜곡도 필요하다! "그 사람 어땠어?"라는 질문에 "좋은 것 같아."라는 답과 "그 사람, 틀렸어."라는 답이 반반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12월이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에게 일어났던 많은 일들을 되돌아보고 내년의 계획을 세울 때이다. 그 시간에 여러분들의 기억이 적절한 왜곡과 편집으로 보람되었던 한 해였다고 기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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