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 충북여성문인협회장·수필가

[김혜경 충북여성문인협회장·수필가] 겨울 조팝이 피었다. 팝콘을 일구어 놓은 듯이 앙상한 나뭇가지에 오종종 하얀 꽃잎이 내려앉는다. 바람도 없이 소리죽여 눈 내리는 날 가슴 저 밑에서 살며시 밀려 오르는 그리움이 발길을 들로 내몬다.

 눈은 이미 사방 천지에 근사한 동양화를 커다란 화폭에 그려 놓았다. 새하얀 융단이 깔린 길에 검은 발자국을 찍어내기가 민망하여 살금살금 걸음을 옮긴다. 추위에 떨던 나목이 하얀 누비적삼을 걸친 듯 포근한 미소를 짓는다.

 한 여름의 갈증을 견디며 키워 낸 곡식을 모두 내어주고 빈 가슴을 벌리고 있는 밭에 까치 한 쌍이 날아든다. 고개 조아려 눈 속을 헤집고 또로록 한 마리가 달려가면 다른 녀석도 폴싹 곁으로 날아 앉는다. 고개를 맞대고 속살거린다. 사랑을 하는 것일까, 끓어오르는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 공연히 눈 속을 헤매는 청춘의 젊은 아이들 같다.

 '그랬지, 나도 그랬지' 소리 없이 포근하게만 내리는 눈에 취해 무작정 들판을 쏘다니던 날 첫눈이 맞아버린 사랑도 있었지. 장갑에 가로막힌 사이도 너무 멀어 맨손 잡고 한없이 걸었던 눈보다 더 하얀 사랑이 조용히 추억으로 내려앉는다. 사랑은 아프기 위해 하는 것이며 눈은 녹기 위해 내린다 했던가. 눈 녹아 사라진 날 맞잡았던 손도 스르르 풀리고 봄 햇살을 따라 서로의 길을 찾아갔다.

 끝없이 저지르는 잘못들을 사랑의 힘으로 덮어 나가듯 세상의 汚辱至情을 하얀 눈이 소리 없이 덮어간다. 가난은 죄가 아니야 라고 머릿속에선 외치지만 가난이 죄가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낮게 드리운 검은 구름이었다. 세상의 잣대로 사람을 볼 줄밖에 모르는 편협한 마음이 한없이 부끄러워 어딘가로 숨어들고만 싶은 날 고요히 내리는 눈은 포근히 안길 수 있는 어머니의 품속이 된다.

 푸드득 까치가 날아간다. 얼기설기 잔가지를 주워 얽어 놓은 둥지 하나면 족할 보금자리를 찾아갔겠지. 욕심 없이 사는 그들의 세상에선 하얀 눈 속에 가두어둔 어두운 추억은 없으리라. 산사로 향하는 오솔길에 순백의 정적만이 내려앉는다.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발자국마다 검은 묵죽(墨竹)을 쳤다. 화들짝 놀라는 사이 어느새 눈은 검은 자국을 또 지워간다.

 인생의 먼 길을 걸어오며 우리는 쉼 없이 고운 자국보다는 욕심에 물든 자국을 더 많이 만들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앞만 보고 내 달려온 길에 먹을 찍어 놓듯 오욕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왔으리라. 되돌아 갈 수 없는 길이기에 묵죽(墨竹)을 쳐 놓은 내 뒷모습이 부끄럽기만 하다. 싸리비 내어 슥슥 지워갈 수만 있다면, 고무래로 밀듯 검은 기억들을 밀어 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얀 눈만이 내 뒤를 따라오며 흉한 발자국을 지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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