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회 청주시 오근장동장

[김복회 청주시 오근장동장] 산처럼 쌓여 있는 배추를 꺼내 반으로 가른다. 노랗게 잘 익은 배추속이 입맛을 자극한다. 올해도 변함없이 엄마가 애써 키운 배추와 고추, 마늘 등으로 김장을 한다. 해마다 하는 김장이지만 필자는 일한다는 핑계로 절이고 씻는 힘든 일은 하지 않고 버무리는 일만 함께 했었다. 그동안 동생들에게 너무 미안해 올해는 연가를 내서 처음부터 함께 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커다란 고무다라에 소금을 풀고 배추를 담가 숨을 죽인다. 마늘을 까고 파도 까고 모처럼 허리가 아프도록 일을 했다.

 다음날은 숨이 죽어 기가 빠진 배추를 씻는다. 노란 배추 속 유혹에 넘어가 한 잎 뜯어 입에 넣으니 달착지근하니 맛있다. 올해 김장도 성공예감이다. 갖가지 양념들이 섞여진다. 인천 사는 셋째 여동생이 가져온 황석어젓과 멸치젓 냄새가 진하게 입맛을 돋운다. 봄에 새우를 구입해서 담았다는 새우젓도 누렇게 익어 맛을 보탠다. 육지에서 생산된 엄마 표 양념과 바다에서 온 양념이 두로 섞여 조화를 이룬다.

 세상 이치도 이렇지 싶다. 저 혼자서는 큰 쓰임새가 없지만 서로의 성깔을 죽이고 두루 섞이다보면 시너지 효과는 몇 배가 된다. 해마다 하는 김장인데도 간을 맞출 때면 짜다 싱겁다 하고, 더 넣어라 그만 넣어라 하며 옥신각신하게 된다. 자주하는 일이 아니어서 그럴 것이다. 양념이 만들어지고 삥 둘러 앉아 속을 넣고 각자 가져온 각양각색의 김치 통들을 하나 둘씩 채워간다.

 김치통이 거의 채워질 즈음 김장의 별미인 수육이 들어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육에 온갖 양념으로 버무린 배추 잎을 말아 먹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형제들이 각지에 흩어져 살다보니 모두 모이기가 쉽지 않다. 강원도에 사는 둘째는 명절에는 거의 참석을 못했다. 거리가 멀다보니 자주오지 못했다. 그러나 김장을 할 때만은 7남매가 모두 모인다.
 
 엄마가 애써 가꾼 농산물과 모두의 정성으로 겨울 양식을 함께 준비한다. 그렇게 모여서 김장을 한지도 거의 15년이 넘지 싶다. 겨울 양식을 준비하면서 오세영의 "겨울의 끝"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시인은 김장을 매운 고춧가루와 쓰린 소금과 달콤한 생강즙에 버물려, 김장독에 갈무리된 순하디 순한 한국의 토종 배추, 양념도 양념이지만 적당히 묵혀야 제 맛이 든다고 했다. 또 사계절이라고 하지만 세상은 본디 언제나 추운겨울이요 인생은 땅에 묻힌 김칫독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느 날인가 그 분이 독을 여는 그때를 위해 잘 익어 있어야한단다. 이렇듯 잘 숙성된 김치는 우리 삶의 또 다른 비유일지도 모른다.

우리 형제들 모두가 잘 익은 김치처럼 숙성된 그런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겨우내 온 식구가 먹을 김치가 그득하니 월동 준비가 다 끝났다. 이제 겨울이 시작되어도 아무 걱정 없을 것 같다. 내년에 아니 그 이후에도 우리 칠남매가 엄마 표 김장을 함께 할 수 있길 소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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