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송순 여백문학회원·동화작가
두 시간 강의를 끝내고 나면 입에서 단내가 난다. 그래도 난 강의 자료를 다시 챙겨들고 내덕 2동 동사무소 가까이에 있는 그녀의 가게로 발걸음을 옮긴다.

"딸랑, 딸랑~" 그녀의 가게 문을 열 때마다 어김없이 들려오는 맑은 종소리와 향긋한 빵 내음은 언제나 정겹다. "어머나, 오셨어요? 또 강의에 참석하지 못했네요."

분주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던 그녀는 배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래서 제가 왔잖아요."
미안해하는 그녀에게 오늘 수업을 한 수필 한편과 시 한편을 건네주며 글쓰기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얘기만 하곤 돌아 나오려는데, 그녀는 자리에 앉기를 고집한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제가 오늘은 꼭 보여드릴게 있어서요." 나와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빵을 사러 오는 손님들은 연신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그녀는 내가 오래 기다리고 있는 게 미안한지 몇 번이고 돌아다보며 웃어보였고, 난 그 때마다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손님이 뜸해지자, 그녀는 가게 구석에 있는 붙박이장에서 비닐로 싸인 작은 수첩 한 권을 들고 왔다.

"선생님, 한 번 읽어 봐 주시겠어요? 제가 오래전부터 틈나는 대로 써놓은 거예요." 건네주는 수첩의 비닐 표지는 '오래전부터'라는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많이도 낡아있었다. 그런데 내가 수첩의 첫 장을 막 넘길 때쯤 그녀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는데도, 난 순간적으로 외부와 단절된 것처럼 한동안 수첩 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 색깔 없이 검정색 볼펜으로 쓱쓱 그려져 있는 여러 가지 모습과 그 사이를 채운 짧은 글귀들! 꽃바구니, 탁자, 하늘, 나무, 바람, 교회…. 그녀의 깊고 아름다운 생각들은 작은 수첩 안에서 그림과 글이 돼 나비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시간 있을 때 마다 그림 그리고, 몇 글자씩 끼적이고 있어요. 이런 것도 책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녀의 목소리가 내 침묵 속으로 다가왔을 때, 난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당연하지요. 이렇게 좋은 건 책으로 만들어져야지요. 혼자만 갖고 계시면 아깝잖아요."
내 말에 그녀는 수줍게 웃어보였지만, 난 그 순간 내가 '1인1책 만들기 운동' 강사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자부심을 느꼈다.
'1인1책 만들기 운동'은 직지를 탄생시킨 우리 고장의 정신을 되새기고, 그 전통을 이어받기 위하여 전국 최초로 시행하는 책 펴내기 운동이다. 그 운동은 말 그대로 청주 시민 각자가 책 한권씩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는데 벌써 올해로 3년째 이어지고 이미 많은 책들이 출간됐다. 인생을 살면서 이야기 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그 이야기들을 가슴에만 담고 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하지만 청주시가 시행하는 이 운동으로 가슴에만 묻혀있을 좋은 글과 그림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니 참 좋은 일이다.
"지금까지 하신대로 올 해도 열심히 해보세요. 글을 쓰면서 어려움을 만나면 제가 힘이 되어드릴게요."
그녀와 힘 있게 악수를 나누곤 길로 나서면서도 내 흥분된 가슴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올 12월쯤에는 예쁜 책으로 묶여 세상 밖으로 외출할 그녀의 아름다운 글들과 또 어디에선가 만날 누군가의 따듯한 인생이야기를 봄이 오는 길목 위에서 잔뜩 기대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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