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자 수필가

[한옥자 수필가] 세월이 가는 체감 속도를 나이에 비기는 일을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사는 사람이라면, 새해를 맞고 어, 하다가 연말을 맞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세월과 나이는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둘을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은 자연의 흐름에 딴지 거는 것이라고 비웃었다. 결코, 세월과 나이를 인간의 말로 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새해 다짐과 각오를 따로 해 본 적이 없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에 휘둘려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계획은 스스로 중압감을 만들어 가는 길이라 부담스러웠다. 섣불리 나섰다가 도중에 하차하고 번번이 느껴야 하는 자괴감을 감내하기가 싫어서였다. 특별한 계획을 세워도, 세우지 않아도 한 해의 끝과 시작은 어김없이 왔다.

 시간의 속도는 여전히 나이와 무관하다고 고집스럽게 믿는다. 그러나 책을 볼 때마다 읽은 양에 비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책의 글자 크기가 10 폰트는 되어야 읽히고 그나마도 잠에서 막 깼을 때나 밤늦은 시간에는 글씨가 보이지 않아 눈을 비비거나 껌뻑이다가 책을 내려놓는다. 곧 대 활자본을 따로 사야 할 지경에 이른다면 세월과 인체 나이만큼은 가끔 비교하게 될 것 같다.

 최근 몇 권의 책을 샀다. 또 주말이면 집 앞의 도서관에서 두세 권의 책을 대출했다. 읽을거리가 없던 시절을 한풀이하듯 책만 보면 욕심이 난다. 온전히 다 보지 못한 책이 쌓여간다. 대출받은 책은 반납기일을 연장해서도 다 보지 못한 채 반납하기 일쑤이다. 찢어진 신문 쪼가리라도 눈에 불을 켜며 보던 학창 시절을 생각하며 자꾸만 책을 펼치나 시력 외에 절박한 독서 방해 요인이 모바일 탓을 안 할 수가 없다. 
 
 모바일로 뉴스를 접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리자 책은 멀어졌다. 뉴스를 오래 볼수록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에 몹시 익숙해지게 된다고 말하는 알랭 드 보통의 저서 '뉴스의 시대'도 아직 반 정도밖에 읽지 못하고 있다. 책뿐 아니라 멋진 풍경도 멀어졌다. 뉴스의 과잉 시대는 누구도 피하지 못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뉴스에 젖어 중독 수준에 이르렀다. 인류의 절반이 매일 뉴스에 넋이 나가 있다, 는 알랭 드 보통의 글처럼 넋을 잃고 사는 것이다. 이것이 독서를 망치는 철저한 방해자이다.

 가족을 화마에 빼앗기고 절규하는 남겨진 사람에 대한 뉴스를 보며 잠시 울컥했다가 이내 다른 뉴스를 본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뻔뻔함의 결정체인 정치판 뉴스를 보다가 문화계 뉴스도 한 도막 보고 나서 제 할 일을 한다. 잠시 분노하고 잠시 두려웠지만, 작가의 말처럼 익숙해진 감정은 금방 멀쩡해졌다. 그리고 잊혔다.

 뉴스와 미디어가 많이 위험하다. 사실을 파헤쳐 잘못을 지적하고 감시해야 하는 역할을 자주 잊거나 피하는 것은 아닐까? 고의로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은 아닐까? 과한 머리기사에서 보이는 위장. 세뇌를 위한 반복. 비단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이것이 뉴스를 의심해야 할 이유이며 자주 뉴스에 휘둘리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새해 해야 할 일은 따로 세우지 않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나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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