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육정숙 수필가] 마치 새하얀 도화지를 펼쳐 놓은 듯, 온 세상이 하얗다. 오만가지 빛으로 자신을 드러내던 세상은 이제 아무것도, 그 어떤 흔적도 없는 태초의 순수다.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 인위적인 그 어떤 것도 상응 할 만 한 것이 없다. 공기마저 흐름을 멈춘 듯 고요 속으로 침잠된 세상이 그저 적요할 뿐이다. 호수인지 도로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 모두가 순백의 세상이다. 대청호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경계를 잃었다. 이 경건함 앞에서 예의를 갖추고 이 순간, 이 모습 이대로 멈춘 채, 영원의 시간이 되기를 절대자에게 청원해본다. 삶이라는 현실 속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나의 진정한 바람이다.

 문득 허망한 이야기 같지만 스치듯 지나가기엔 아쉬운 이야기를 꺼내본다. 기도 중에 하느님이 가장 잘 들어 주는 기도는 감사기도라고 한다. 어떤 이가 깊은 산중에 홀로 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났다. 그는 '호랑이에게 잡혀먹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는 청원의 기도를 올렸고 호랑이는 '제게 먹잇감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감사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결과는 감사기도가 효력이 있었다고 한다.

 늘 무언가를 원하기만 했던 모습이 겸연쩍어 희뿌옇게 흐린 하늘만 올려다본다.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잿빛 구름덩이들이 묵직하게 다가선다. 대지와 하늘 사이의 공간이 구분이 없다. 그 공간으로 하얀 눈송이들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린다. 마술에 걸린 듯, 그동안 잊고 살았던 일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그리움이다. 무언가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마도, 그 시절에 못 다했던 일들에 대한 아쉬움들이 무의식의 공간속으로 품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내 일생의 청춘! 그 때 그 시절로 돌아 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대로 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사실 제대로의 삶의 기준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자연의 경이로움이, 가슴 먹먹하게 해주는 오래전의 날들을 부른다. 그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이 뒤를 돌아보게 한다. 신 새벽에 청명함이 빚어 낸 어설픈 흔적들이 하얗게 흩날리는 춤사위 속으로 스러져간다. 또 한 해가 지나고, 또 새해를 맞이했다. 일상의 연속이 해를 넘기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일이지만 자고 일어나면 맞이하는 아침이 누구에게나 다 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 극작가 '소포클래스'가 남긴 말이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가 그토록 애타게 그리던 내일이라고' 늘 맞이하는 오늘이지만 다 같은 오늘이 아니다.

 오늘은 세월이 흐른 만큼의 경험과 연륜으로 맞이한 시간이다. 그 시점에서 돌아보는 어제의 시간들이 어설프고 헛되게 보일지라도 그 시간들로 하여금 이루어진 오늘의 내 모습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새하얀 눈길 앞에 서있을 기회가 또다시 주어졌다. 감사한 일이다. 내게 주어진 새날, 오늘이다. 아무도 앞서 가지 않은 길! 감사히 받은 오늘이 헛되지 않도록 그 오늘 하루를 설렘으로 시작한다. 그조차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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