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소담하게 눈이 내린 날이다. 처음 시작하는 일을 앞두고 서설인 듯 반가운 마음이다. 올해부터 어르신들의 한글 교육에 참여하게 되면서 새삼 마음이 설렌다. 교육장으로 선택한 곳은 백곡면에 있는 장대마을 경로당이다. 내가 태어난 고향 이웃이다. '여우도 죽을 때면 머리를 제 살던 굴 쪽으로 바르게 하고 죽는다'는 말이 있듯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마음이 자꾸 고향 쪽으로 향하고 있다.

 예로부터 돌고개 장터마을로 불리던 곳이다. 면사무소와 지서가 있고, 양조장, 약방, 의원이 있는 중심가로 장이 섰다. 어릴 적 생각으로도 잘 사는 동네 같아 보였다. 시장의 속성상 경제가 가장 활발하게 돌아갔을 것이니 그리 보였나 보다. 면 소재지의 번화가인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장터 아이들은 가끔 길목에서 텃세를 했다. 공연히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지분거렸다. 우리 동네에서 5리나 되는 초등학교를 걸어 다니려면 꼭 이곳을 지나쳐가야 한다. 나는 물론이고 여자애들은 혼자 다니는 걸 꺼렸다. 타 동네 앞에서 대거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불과 몇 십여 전의 일이 아스라하다. 흥청하던 장터가 없어지고 약방도 의원도 자취 없이 사라져간 지금, 백곡 양조장은 '잣나무골 술도가'란 멋스러운 우리말로 간판을 내걸고 할아버지에 이어 3대째 대물림을 하고 있다. 술도가의 사장이 바로 마을 이장이다. 부녀회장과 더불어 '장터 글방' 여는 일에 적극적이다. 이 글방을 통해 언젠가 돌고개 장터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 보리라 의기투합한 것과는 달리 대상 어르신들은 부담이 큰 듯하다.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집안이 어렵다는 이유로, 아니 그보다 여자라는 이유로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한 분들이 많다. 초등학교 문턱을 밟았다 해도 연필 잡아본 기억조차 까마득한 실정이니 이름인들 온전히 써지겠는가. 경로당에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80세 전후다. 느닷없이 글방을 열고 공부를 한다 하니 뒤늦게 무슨 골치 아픈 일인가 싶기도 하고, 남보다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살아온 그 분들이 삶과 가슴속 한을 풀어낼 수 있는 장을 열어주고 싶다. 살아온 이야기를 말로만 들으면 그냥 넋두리로 그칠 것을, 글로 엮어 낸다면 한사람, 한 시대의 역사적 된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쳐 보릿고개를 힘겹게 걸어온 분들이다. 오늘의 경제를 바로 세운 밑돌로 민족의 수난사와 궤적을 함께 해 왔다. 부모 자식 먹여 살리느라 자신을 가꿔오지 못하고 하얘진 머릿속, 굳어진 손 마디마디에 주눅 든 모습이 안타깝다. 두 번째 방문하던 날 공부 시작 전 슬그머니 일어나 어기적어기적 집으로 향하는 뒷모습이 눈에 밟힌다. 치열하게 살아온 역사의 주인공이면서 무엇이 저들을 당당하지 못하게 했는가.

 고향의 어르신들이라 학용품 일습을 선물로 장만하며,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을 찾아 준비하는 내내 즐겁고 신나했던 마음이 어쩌면 그들이 배 골며 호의호식 키워낸 후대들의 철없음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해야 할 사명중의 하나라는 생각은 더 단단하게 자리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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