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이향숙 수필가] 객석은 만석이다. 아니 만석을 넘어섰다. 양쪽 날개를 펴듯이 계단에 앉기도 하고 중앙통로에 자리를 잡는 관객이 있는가 하면 뒤에 서서 관람하는 이가 이 십여 명이다. 젊은 엄마들은 어린 아이들과 나란히 앉아서 눈과 손으로 말한다. 이야기가 있는 음악회의 문이 이렇게 열린다.

 첫 무대는 종교음악으로 유명한 헨델의 협주곡이다. 사회자는 왕과 고관대작들이 듣는 음악이란다. 챔발로라는 피아노를 닮은 악기와 첼로, 비올라, 바이올린으로 연주한다. 처음에는 빠르게, 천천히, 다시 빠르게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는다. 덕분에 고관대작이라도 된 양 손끝까지 우아해진다.

 두 번째 무대는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이다. 젊은 청년의 협연 무대이다. 저음의 클라리넷은 가슴 깊이 숨어있던 감성을 끄집어낸다. 편안하면서도 달콤한 선율이다. 아마도 이런 점에서 모차르트 곡은 태교음악으로 각광받나 보다. 눈을 지그시 감으면 행여 상처 났던 삶일지라도 치유된 결로 드레스를 지어 입고 춤을 추는 무희가 되기도 한다.

 세 번째 무대는 그리그의 두 개의 슬픈 선율중 지나간 봄이다. 노르웨이의 시인 베녜의 시로 곡을 만들었단다. 새봄의 연두빛, 파릇함을 지나 늦봄, 그리고 지나간 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봄이 언덕 너머까지 다가온 따스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가 하면 허망하게 떠나가는 그의 모습이 눈에 어릿하다. 그래도 봄은 겨울보다 바람마저 보드랍다.

 네 번째 곡은 사계로 유명한 비발디의 붉은 방울새다. 귀여운 플루트 연주자와의 협주곡이다. 방울새의 극대화된 묘사는 바로 눈앞에서 앙증맞은 지저귐과 움직임이다. 방울새와 한 몸이 된 협연자의 모습과 객석의 내가 하나 되는 것은 음악의 문외한임에도 가능하다.

 다섯 번째 곡은 구스타브 홀스트의 현을 위한 성 바울 모음곡 작품 29번이다. 영국의 현대 음악의 거장인 그는 세인트 홀의 여학교 교사로 학생들의 활발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담았다. 학창시절 친구들과의 추억이 떠오른다. 수줍음이 많던 시골학교의 계집아이였던 나와는 색깔이 다른 선율이다.

 무대 인사가 끝나고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여운을 즐기며 복잡한 객석이 한산해지길 기다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클래식보다는 대중음악을 즐겨들었던 젊은 날이었다. 대학 캠퍼스 앞에서 구멍가게를 할 때 단골학생이 초대장을 주었다. 클래식 음악회임에도 어린 아이들도 관람할 수 있어서 유치원생이던 아이들을 데리고 객석에 앉게 되었다.

 아이들이 연주회 내내 흥미를 잃지 않아서 그 후로 가끔 참여하게 되었다. 덕분에 아이들은 그 마당에서 놀았다. 아쉽게도 지난해 이사를 오게 되었다. 우연인지 산보하기에 좋은 거리의 시청에서 음악회를 열었다. 덕분에 새해를 맞이하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가 좋다. 남녀노소 누구나 객석에 앉을 수 있고 자리가 부족하면 계단에 앉아서도 감동받은 만큼 박수를 칠 수 있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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