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자 수필가

[한옥자 수필가] 사죄하겠단다. 관행과 관습에 의한 나쁜 행태였고 나쁜 죄 인줄 모르고 행했단다.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서 벌인 일이란다. 그는 집요하게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관행, 관습이라는 말로 자신의 행동을 치졸하게 변명했다. 관행과 관습은 사회 구성원이 널리 인정하는 질서나 풍습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정기적 성폭력에 관행과 관습이란 말을 사용했다. 평범한 여자들은 물론이고 건강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발언을 공감할 수 있는가?

 세상의 모든 남자를 한꺼번에 매도하여 자기 합리화에 전념하자는 말이다. 공동책임을 지고 함께 죽자는 물귀신 작전이나 다름없다. 필자는 이렇게 묻는다. '여러분, 이 나라에서 자행되는 성폭력이 관행과 관습입니까?' 여자를 비롯한 모든 약자는 성폭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약자를 돌보려는 성숙한 인격보다는 약점을 이용해 추한 욕망을 채우려는 천박한 자가 많은 까닭이다.

 필자도 여러 유형의 성추행과 성희롱 경험이 있다. 20대 초반의 아가씨는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두꺼비 같은 손의 침입을 받아야 했다. 오른쪽 넓적다리에 올랐던 나이 지긋한 남자의 손바닥은 뱀과 지렁이, 바퀴벌레보다 더 끔찍한 이물질이었다. "왜 남의 다리를 만져요!"라고, 소리치며 좌석에서 일어났을 때 그의 얼굴은 붉어졌고 청각 이상자 행세까지 했다. 생각해보면 어린 아가씨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입사한 직장에서도 유부남 상사의 느끼한 눈빛과 언행을 번번이 참아내야 했다. 조용한 곳으로 바람 쐬러 가자, 맥주 한잔 하자는 말을 들을 때마다 못 알아듣는 척 소극적으로 피했으나 돌아서면 심하게 요동치는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다행스럽게 그 무렵 집 근처로 발령이 났고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자신도 피해자였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감 때문에 사람들은 분노한다. 그것이 '미투(me too) 운동'의 시발점이며 사회적 환경과 분위기가 더욱 정의로워지길 바라는 약자의 마음이다. 군대와 직장 여성 상사가 가하는 성폭력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폭력의 공통점은 상대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하고 무시한다는 거다. 권력과 힘의 남용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는 거다.

 사실 아무개가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은 결코 충격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사건이 있었고 마땅한 해결책은 없었다. 지금도 언론은 사건만 알리고 성폭력방지법의 문제와 미래를 대한 논의는 하지 않는다. 공소시효가 지났고 처벌이 어렵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제2의 제3의 사건만을 들추어내고 있다. 사회적 공분만을 조장하겠다는 거다. 공분 후에 해결 방안이 없다면 우리는 사회적 공분 놀이 조성에 이용만 당하고 추락할지도 모른다.

 시급한 사안은 공소시효가 없는 성폭력방지 특별법의 제정이다. 본인이 신고하지 않아도 제3자가 신고 가능한 법을 원한다. 합의제도도 폐지해야 한다. 이것이 또 다른 성범죄를 예방하는 길이며 합의를 빌미로 거금을 취하려는 자를 방지하는 길이다. 관행과 관습은 밝게 만들어져야 비로소 당당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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