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향해 이와 같이 말한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막 6:20-21)

 당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가난하고 주린 자들이었다. 그들은 매일의 삶을 가난과 배고픔 속에서 애통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는 가난하고 배고프고 애통하는 지금의 날들을 바라보지 말고 장차 다가올 부유하고 배부르며 웃음으로 가득한 날들을 소망하라고 이야기한다. 미래에 대한 소망은 오늘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된다. 당장은 아무 기대할 것이 없지만 다가올 미래의 희망이 오늘의 나를 일으키는 힘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의 선포에 주목할 점이 또 하나있다. 예수의 선포는 그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소망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예수가 선포한 미래의 소망은 현재의 조건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고 주리고 애통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와 같은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 현실의 고통이 그 자체로 미래의 소망을 위한 자격이 되는 것이다.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가난을 벗어날 방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주린 자에게 배를 채울 방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는 자가 어떻게 해야 웃을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그들이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인생이기에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선포한다. 거위를 소유한 농부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않도록 자신을 제어할 책임이 있지만 예수가 말한 자들은 자신들의 현재 상황 그 자체로 인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 가난한 자들, 배고픈 자들, 우는 자들은 그 자체로 삶의 변화를 약속받아야할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을 풍요와 배부름과 웃는 자의 삶으로 바꾸어야할 의무나 책임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와 같은 책임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훈들이 결과의 책임을 가르침을 받는 당사자에게 돌린다. 아무리 좋은 교훈이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공허한 외침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이들의 열정과 패기는 젊은이들 스스로의 책임만은 결코 아닌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뜻을 하나로 모아 도전하는 이들의 용기를 높이 살 때, 더 많은 도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더 많은 도전은 더 많은 성공의 기회를 보장한다. 쌓여가는 실패의 횟수만큼이나 성공을 향한 노하우가 더욱 축적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와 같은 사회적 현상이 곧 하나님 나라 임재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사회라면 지금 가난하고 주리고 애통하는 자라도 그 문제를 넘어 웃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 평창 겨울 올림픽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성공한 행사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것은 어느 누구 하나의 책임과 능력이 아니라 온 국민의 관심과 응원으로 이루어진 결과임을 기억할 때 서로가 서로의 짐을 함께 진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결과를 이룰 수 있는지 우리는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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