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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풍경이향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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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02  10:4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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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숙 수필가] 제법 살이 올랐다. 정월대보름달의 얼굴이다. 동네 언니, 오빠들을 따라 나섰던 이즈음의 추억이 보름달 속에 그려진다. 아버지는 할머니께서 맛나게 드시고 난 황도캔으로 쥐불놀이 통을 만들어 주셨다. 못을 대고 망치로 툭툭 두드려 구멍을 내었다. 솔방울과 잔 나뭇가지를 잘게 부수어 넣고 불을 붙였다. 바깥마당까지 따라 나오신 아버지는 깡통을 돌리는 시범을 보이고 내게 연습을 시킨 다음에 보내 주셨다.

 상진말, 안동네 할 것 없이 방아다리로 모였다. 논은 마치 강처럼 마을의 시작부터 흘러 내렸다.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쥐불놀이를 시작했다. 논도 태우고 둑도 태우자 윗마을에는 은하수가 반짝이고 아랫마을에는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털신 속에 들어간 먼지를 털어 내며 눈만 마주쳐도 깔깔댔다.

 동그라미를 그리는 쥐불들이 사그러들 즈음 흩어져 집으로 향했다. 보름달이 만들어준 그림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간다. 마중 나온 어머니에게 세상을 구하고 온 듯이 수선을 떨며 자랑을 했었다. 할머니의 머리맡 대접에는 부엌 한 켠에 묻어 두었던 알밤 몇 알과 마른 대추가 놓여 있었다. 그 중 어머니의 손길 덕분에 하얀 속살로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고 있는 한 놈을 집어 오도독 씹었다. 지금처럼 골고루 부럼을 먹을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나마 뒷산의 밤나무 덕분이지 싶었다.

 쥐불놀이 후유증으로 꼼짝할 수 없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할머니는 밥상이 들어온다며 나를 일으켜 앉혔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방안 가득하다. 아주까리, 가지나물, 고구마 순, 시레기나물과 산나물이 정갈하다. 남당리의 고모가 보내준 김이 들기름을 바른 채 아궁이에서 구워졌다. 어머니의 야심작 어리굴젓도 오목한 접시에 소담하게 담겼다. 무를 납작하게 썰어 소가 목욕한 듯 멀건 쇠고기국도 자리를 잡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기장, 팥, 콩, 수수가 들어간 오곡밥이 소담하게 담긴 밥공기에서 김이 모락모락 난다. 아버지는 간장종지만한 술잔을 나누어 주시더니 할머니에게 한잔 올린다. 어머니와 우리에게도 잔이 술기를 머금을 만큼을 따라주시며 넘치게 따르는 시늉을 하셨다. 아버지는 술잔을 비워야지 올해도 귀가 밝아진다 하신다.

 음력 정월대보름의 하늘은 날씨 탓인지 따뜻하게 느껴진다. 하늘을 가득 채울 듯이 커다란 달은 할머니의 방 윗목의 화롯불처럼 마음마저 데워준다. 어설픈 주부는 어머니의 솜씨를 흉내 내어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조물 거려 상에 올리고 부럼을 준비했다. 오늘밤은 꿈자리에서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 쥐불놀이를 지치도록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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