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육정숙 수필가] 봄은 시나브로 동장군을 밀어내고, 어느 결엔가 따스한 바람과 햇살을 품고 곳곳을 보듬고 있다. 나뭇가지에서, 베란다 창 문 틈새에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노는 모습에서, 밭둑에 파릇하게 내민 냉이의 향기에서, 겨우 고개 내민 어린 쑥의 솜털에서, 쟁기질을 시작하는 농부의 굵은 손마디에서 봄이 머문다. 봄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날 수 있는 힘들을 솟아나게 해준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길을 따라 대청호반을 찾았다. 비가 내리니 사람들의 발길은 뜸했다. 호반위로 자욱하게 내린 안개는 몽롱한 꿈결 속으로 나를 끌어 들였다. 호수인지 산인지 경계가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 시간을 거슬러 신비로운 곳으로 이끌려와 머무는 것 같다. 직선으로만 달리던 선로를 오늘 이 곳에서, 이 시간에 당연히 이탈해야만, 할 것 같은 묘한 감정이 자꾸만 솟는다.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느라 진을 모두 소비한 탓일까! 세상의 변화도, 흐르는 시간의 의미도 놓아버린 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아주 미세한, 한 방울의 물방울들이 모여 만들어 낸, 별천지다. 장관이었다. 신비했다. 마치 지상의 세계가 아닌 천상에 와 있는 듯 했다.

 천천히 숲길을 걷는다. 나뭇가지로, 솔잎으로, 솔잎사이 흙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모두 다르다. 제 각각의 소리인데도 불협화음이 아니다. 악보도 지휘자도 없다. 그들의 소리는 환상의 조합이다. 너무도 잘 어우러진다. 문화재단지 문산관 추녀에서 떨어지는 낙수소리도 다 달랐다. 문산관은 조선시대 문의면의 객사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던 곳이었기에 들리는 소리도 다양했으리라. 떨어지는 빗방울도 어디에 떨어지는가에 따라 그 소리가 다 다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소통하자고 질러대는 소리들이 다 달라도, 이 봄엔 이해와 배려의 촉을 틔우고 꽃을 피워 만개하는 아름다운 화음을 기대해본다. 문득 '빗방울'이라는 어느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빗방울이 개나리 울타리에 솝-솝-솝-솝 떨어진다. 빗방울이 어린 모과나무 가지에 톱-톱-톱-톱 떨어진다. 빗방울이 잔디밭에 홉-홉-홉-홉 떨어진다. 빗방울이 현관 앞 강아지 머리통에 돕-돕-돕-돕 떨어진다.』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담아 낸 시인의 외침이 정겹다. 시인의 소리를 따라 나만의 빗소리를 들으며 나만의 숲길을 걷는다.

 이제는 혹독했던 추위도 지나갔다. 지금 이 순간이 힘겹지만 잘 견뎌내고 이겨내리라는 그 기대와 희망이 봄이다. 봄은 먼 곳에서 오는 게 아니다. 늘 우리 곁에 머물러 있음이다. 다만 생각의 차이가 겨울과 봄을 구분하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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