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이향숙 수필가] 감식초를 내리고 항아리를 헹궜다. 자리만 차지하던 메주 말리는 볏짚은 과감하게 버리고 제 몫을 다하지 못한 시든 화초의 뿌리를 뽑아내 분갈이를 했다. 학교에서 단체 구매했던 학용품을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 분리수거함에 넣었다. 어느 정도 정리되어 방향제를 뿌려도 좋으나 허브화분으로 은은한 향기를 연출하였다.

 스무 살 봄, 인천에서 홍성행 버스를 탔다. 큰맘 먹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 용기를 내었다. 핏기가신 얼굴로 홍성터미널에 도착해 다시 버스를 타고 광천, 결성을 거쳐 박철에 다다르자 나는 거의 시체나 다름없었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어머니는 들에 계신지 인기척이 없었다. 마루는 송화가루가 쌓여 걷는 대로 발자국이 생겼다. 방부터 마루를 차례로 쓸어내고 토방과 마당은 수수비로 비질했다. 말라비틀어진 걸레를 빨아서 방마다 닦아내자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어이구 청소 좀 하시지 않고."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부엌으로 들어가신 어머니가 혼잣말을 하셨다. "이틀만 살아봐라." 어색해진 분위기를 닦아내듯 마루를 훔치자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허기진 나를 부엌으로 불렀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몇 년, 농사를 도와주시던 윤진아저씨마저 조카집으로 가셨다. 어머니의 정갈하던 살림솜씨를 들일에 빼앗긴 터였다.

 밀린 빨랫감은 애벌빨래를 해 담가두고 설거지를 했다. 빨래를 마저 해 안마당에 널고 부랴부랴 인천 갈 채비를 했다. 마루에 엉덩이 한번 부칠 시간도 없이 바쁜 어머니가 언제 준비해 놓으셨는지 가방 안에 분홍색 보자기를 펴고 밑반찬을 차곡차곡 쌓아 야무지게 보자기의 매듭을 짓고 계셨다. 혼자가도 된다는 내말을 들으신 건지 못 들으신 건지 반찬가방을 들고 앞서서 고개를 넘으셨다.

 뿌연 먼지를 끌고 오는 버스가 보이자 끼니 거르지 말라 당부하셨다. 내가 할 말을 어머니가 하셨다. 마당 쓸던 빗자루마냥 야윈 어머니가 갈퀴 같은 손으로 눈물을 찍어내셨다. 철없이 핀잔 준 것이 마음에 걸려 반찬 가방을 선반에 올리지도 바닥에 내려놓지도 못했다.

 그렇게 철없던 내가 살림하는 여자가 되었다. 언젠가 요긴하게 쓸 일이 있을 것 같았던 해묵은 볏짚과 학용품은 시간이 지나자 필요 없어진 것을 새삼 느꼈다. 게으름에 먼지 쌓였고 음지의 구석진 곳은 곰팡이마저 슬어있었다. 그때마다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정리를 해야지 싶다. 어디 물건뿐이겠는가.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누군가를 미워했던 마음도, 사랑이라 믿었던 굴절된 집착도 씻어내어 새롭게 봄단장 해야지 싶다.

 산뜻해진 집안 덕분인지 시골집의 송화가루 쌓인 마루가 그립다. 그리움 너머로 어머니가 자신의 인생은 뒤로하고 아버지가 남긴 농사일이 힘에 부쳐 고생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받는 것에만 익숙했던 내가 이제 어머니에게 돌려드려야 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오늘밤은 시골집 마루에 누워 어머니의 고단했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란거리고 싶다. 쑥버무리를 먹으며 내가 내린 감식초 맛을 보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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