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렬
수필가

봄볕이 내리쬐는 밭고랑에는 서걱서걱 마른 나뭇잎들만이 무성하다. 이쯤에 무씨 배추씨를 뿌리면 머쟎아 여린잎이 뾰죽이 고개를 내밀겠지.

마치 어깨동무를 하듯 틈새 없이 촘촘하게 심어 놓은 배추나 무우는 다 자라기 전에 솎아내야 한다. 그래야 김장을 할 때까지 튼실하게 자랄 수가 있다.

지난 가을 평소 친분이 있던 아주머니께서 밭에서 방금 솎아낸 여린 무와 조선배추로 겉절이를 버무려 가져오셨다. 맛도 보기 전에 성급하게 한 끼 분량 정도만 남기고 친정집에도 나누어 주었다. 겉절이 맛이 어쩜 그리도 입에 쪽쪽 붙던지, 남편은 국물도 버리지 말라고 했다. 식사 때마다 친정집에 덜어준 겉절이가 눈앞에서 한동안 눈앞에 맴돌았다.

중앙공원 근처에서 모 행사가 열렸다. 프로그램 한 켠에 나의 시낭송이 얹어 있다. 무대에 서니 시내 중심가의 공원이어서 그런지 참석자의 절반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낭송이 막 끝나고 내려오는 내게 "뉘 집 규수여? 어쩜 그리 목소리가 좋누" 하며, 악수를 하자고 했다.

행사가 끝나고 일행들과 식사를 하기 위해 적당한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렁탕이 단돈 삼천 원"이라는 간판이 시야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단 돈 삼천 원이라니…",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로 향했다. 그런데 식당에 들어선 나는 그만 놀랍고 낯이 뜨거웠다. 그곳은 공원에 오시는 노인들한테만 저렴한 가격에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이상한 것은 주인이 허기를 채우기 위해 찾아온 노인들을 솎아내고 있었다. 70세 미만이면 삼천 원의 식대를 내밀어도 거절했다. 공원에서 하루를 소일하는 노인들이 워낙 많고, 식당에서도 수용인원이 한정되어 있어서라고 했다. 솎아내어 버무린 배추의 맛난 맛이 아직도 혀끝에서 감도는데, 거절당하고 돌아서는 노인들의 발걸음을 보니 한없이 측은해 보였다.

마음 한 자락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없는 이가 어디 있으랴. 너나없이 피해갈 수 없는 게 늙음이란 것이련만….

노인이라 부르는 그들은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시기를 살아온 분들임에 틀림이 없다. 가족과 국가를 위해 평생 동안 고생을 낙으로 살아오면서 자신들의 노후생활은 전혀 준비하지 못한 불행한 세대들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퇴직금을 적립한다거나 정부의 연금제도가 발달해 노후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 그런 이들도 아니다. 게다가 자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경우에는 가난과 질병 그리고 소외와 절망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게 노인들이다. 몸은 비록 젊었을 때만큼 민첩하지 못하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변화하는 사회 환경에 적응하고 싶은 것도 노인들의 소망일 것이다.

활동하는 노인에게는 불안과 짜증이 사라지고 질병과 고독감으로부터도 멀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노년기의 자원봉사활동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초적 과정인 동시에 인생 최후의 자아실현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움직이면서 신체적 기능의 쇠퇴를 얻고 다른 이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노년기 삶에 활력소를 제공한다고 한다.

오래 산다고 반드시 장수가 아니다. 오래 살면서 와병 상태라면 장수라고 하기 어렵다. 부모가 90대이면 당연히 자식은 70대가 된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병이 아니라 하더라도 60대의 자식이 80대의 부모를 돌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식이 이미 노인이 되었으니 마음은 있어도 체력이 따라 주질 않을 것이고, 이미 자식도 남의 손을 필요로 할 것이다. 장수사회가 되면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가족주의적 노후대책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노후를 스스로 지혜롭게 관리해 나가야 하리라.

노인이지만 70세 미만이면 삼천 원짜리 설렁탕집에 절대 들어갈 수 없으리라. 그런 이들을 솎아내는 일이 과연 자연스런 일인가? 나는 이렇게 맥없이 복지국가 타령을 하고 있다. 머지않아 나 역시도 솎아내어질 당자가 되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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